사회
엄격해진 '직권남용' 잣대…양승태·조국 등 재판 가이드라인 되나
입력 2020-01-30 17:33  | 수정 2020-02-06 18:05

대법원이 오늘(30일)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죄에 대해 한결 엄격해진 잣대를 내놓으면서 현재 하급심 재판이 진행 중인 주요 사건들의 판결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입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이날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과 조윤선 전 청와대 정무수석 등이 기소된 이른바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의 상고심에서 원심을 깨고 서울고법으로 사건을 돌려보냈습니다.

재판부는 이들에게 적용된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혐의 가운데 일부를 더 심리해야 한다고 봤습니다. 김 전 실장 등이 공공기관 임직원에게 '의무 없는 일'을 시킨 것이 맞는지를 더 따져봐야 한다는 게 대법원의 취지입니다.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죄는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해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사람의 권리행사를 방해한 경우에 성립합니다.


김 전 실장 등이 문화예술위원회 등 공공기관 임직원으로 하여금 일부 문화 예술인들에게 정부 지원금을 주지 않도록 한 것은 '의무 없는 일'을 시킨 것으로 볼 수 있지만, 몇몇 공소사실에는 더 따져볼 내용이 포함돼 있다고 대법원은 판단했습니다.

즉, 문화예술위원회 등 산하기관 임직원들에게 각종 명단을 보내게 하거나, 지원금과 관련된 심의 진행 상황을 보고하도록 하는 행위는 심리를 더 해 봐야 할 사안이라고 대법원은 지적했습니다. 명단 송부나 보고 등의 행위가 임직원들이 지켜야 할 법령상 의무를 어긴 것인지는 의문스럽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집니다.

대법원은 "상하(上下) 기관 사이에서 이뤄진 일이라고 하더라도, 의견교환 요청에 응하는 행위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법령상 의무 없는 일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판시했습니다. 의무 없는 일을 했는지를 판단할 때는 실제로 법령상에 근거가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는 취지로도 해석됩니다.


대법원은 앞서 서지현 검사에게 인사 불이익을 준 혐의로 기소된 안태근 전 검사장의 사건에서도 비슷한 판단과 함께 무죄 취지로 사건을 돌려보낸 바 있습니다.

당시 서 검사에게 적용하지 않은 인사 원칙은 다양한 고려사항 중 하나일 뿐이지, 절대적 기준이 아닌 만큼 인사 실무자에게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같은 대법원의 엄격한 판단은 당장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사법행정권 남용' 사건과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유재수 감찰무마' 사건 등에 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됩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에게 적용된 47개 혐의 중 상당수는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죄입니다.

그중에는 법관에게 다른 기관의 정보를 빼 오도록 시키는 등 내용도 있지만, 많은 수의 공소사실이 부적절한 내용의 각종 보고서를 작성하도록 법원행정처 심의관들에게 시켰다는 식의 내용입니다.

향후 재판에서 양 전 대법원장 측은 이날 대법원의 판단 내용을 거론하며 "어떤 경우에 보고서를 작성하고, 어떤 경우에는 작성하지 않아야 한다는 규정이 있느냐"고 따질 것으로 보입니다.

반면 검찰은 종전에는 작성하지 않았던 보고서를 양 전 대법원장 시절에만 법원행정처에서 작성한 정황을 내세워 각종 재판에 개입하려는 의도 등 '특별한 사정'이 인정돼야 한다고 주장할 것으로 관측됩니다.


조 전 장관의 사건 역시 죄가 성립하는지를 두고 팽팽한 법리 대결이 펼쳐질 것으로 보입니다.

조 전 장관은 민정수석 재직 시절 유재수 전 부산시 경제부시장의 중대한 비위 혐의가 발견됐음에도 위법하게 민정수석실 특별감찰반에 감찰을 중단하도록 지시한 혐의 등을 받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특별감찰반원이 감찰을 중단하도록 한 것이 '의무 없는 일'에 해당하는지가 쟁점이 될 수 있습니다.

조 전 장관의 변호인도 직권남용 혐의를 적용한 검찰의 공소논리에 대해 "특감반원의 권한이 인정되지 않아 사상누각"이며 "민정수석의 재량 판단 범위 안에 있던 일"이라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부장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기계적으로 무조건 감찰을 진행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경우에는 하지 않아도 되는 재량이 있을 수 있지 않으냐"며 "그런 점에서 감찰을 중단한 것이 과연 의무 없는 일이냐는 질문이 나올 수 있다"고 논평했습니다.

[MBN 온라인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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