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세입자에 내줄 보증금 대출도 막아…집주인들 "내집도 못들어가나"
입력 2020-01-21 17:39  | 수정 2020-01-21 19:08
"청약도 족족 떨어지고, 내 집 마련하고 싶어서 집을 샀습니다. 이사 날짜가 안 맞아 전세 낀 물건을 샀을 뿐인데, 원래 제 집으로 들어가려 하니 전세퇴거자금대출이 줄어들어 제 집에도 못 들어갈 처지입니다. 집 한 채 가졌다고 전세대출을 막아놔 전세도 못 살고 막막합니다. 정부는 실수요자를 보호한다고 해놓고 저 같은 사람은 국민이 아닌가요."
서울 마포구에 살고 있는 주부 양 모씨(51)는 정부의 12·16 부동산대책 발표 이후 잠을 못 이루고 있다. 고가 주택 소유자의 전세자금대출 제한과 고가 주택 대출 한도 축소 등이 전격 시행되면서 '오갈 데 없는 처지'가 됐다. 양씨는 지난해 12월 초 자녀 교육을 위해 서울 강남구 아파트 전세를 안고 매수했다. 전세 만기가 5개월 뒤(2020년 4월)여서 이사 날짜를 맞추려 했다. 그러나 12·16대책 이후 모든 계획이 헝클어졌다. 집을 계약할 때 전세퇴거자금대출이 주택담보대출비율(LTV·40%) 수준으로 나올 것이라 봤는데, 9억원 초과분에 대해 20%만 적용돼 1억원 가까이 부족하게 됐다.
양씨의 문제는 그렇다고 다른 곳에 살 수도 없게 된 것이다. 고가 주택 소유자에 대한 전세자금대출이 금지됐다. 결국 현재 사는 곳에서 월세로 살거나 친척집에 들어가 얹혀 살아야 할 판이다. 양씨는 "교육이나 전직 등 중요한 계기에 이사를 결정하는데, 정부의 갑작스러운 부동산 정책으로 엉망이 됐다. 전세 만기일이 다가올수록 잠은 안 오고 화만 난다"고 말했다.
고가 주택 대출 한도 축소와 주택 소유자 전세대출 제한 등 12·16 규제로 9억원 이상 주택 실수요자들이 혼란에 빠졌다. 기존 대출 한도로 계산하고 집을 마련한 이들은 갑자기 대출 한도가 줄어들자 자금 마련에 비상이 걸렸다. 게다가 주택 소유자는 전세자금대출까지 막혀 오도 가도 못할 처지가 됐다.
21일 부동산 업계에 따르면, 9억원 초과 주택 소유자들이 '12·16 규제 이전 1주택 보유자의 전세금 반환 대출 LTV 한도를 40%로 해달라'는 국민청원을 청와대에 신청했다. 정부는 12·16 이후 집을 매수할 때 9억원까지는 LTV 40%를, 9억원 초과분은 20%를 적용한다. 그러나 대책 이전에 집을 구입한 경우(매매 계약 체결 기준) 종전 규정대로 일괄 40% 적용한다.

청원자는 12·16 이전 9억원 초과 고가 주택을 구입한 사람에 대해 전세퇴거자금대출도 일괄적으로 40%를 적용해달라고 요구한다. 14억원 주택은 기존 대출 한도가 5억6000만원이지만 12·16 규제로 1억원이 줄어든 4억6000만원이다.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규제 강화분까지 반영하면 기존 규제와 새 규제 간 대출 한도 차이는 더 벌어질 수 있다.
한 청원자는 "당초 전세를 안고 집을 계약할 때 퇴거대출을 계산해서 매매했는데 12·16 이후 전세퇴거자금대출 가능 금액이 1억원 넘게 줄어들었다. 게다가 시세 9억원이 넘는 서울 1주택자는 전세자금대출도 제한되기 때문에 본인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전세대출도 받을 수 없는 진퇴양난 상황에 놓이게 됐다"며 "선의의 피해자가 생기지 않게 고려해달라"고 호소했다.
정부는 12·16 대책 이전에 고가 주택을 구입한 사람에게 '경과 조치'로 퇴거자금대출을 내주지만 기존 규정인 LTV 40%를 일괄 적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대책 시행 이후 대출을 신청하면 LTV 비율은 새 규제를 적용해 9억원까지는 40%를, 9억원 초과분은 20%를 적용한다.
정부는 최근 부동산 시장 불안의 중심에 전세를 끼고 주택을 매입한 일명 '갭투자'가 있다고 보고 있지만, 9억원 초과 주택 구매자들은 이사 날짜나 자금 부족 등을 이유로 전세를 안고 매수한 실수요자라고 항변한다.
서울에서 전세를 안고 매수하는 것은 보편화된 방법이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보증금을 승계해 매수하는 비중이 서울은 50%(지난해 11월 기준)를 넘고, 강남 4구는 63%에 달했다.
김 모씨는 "기존 세입자 전세 기간이 1년 남았다기에 기다렸는데, 투기꾼 취급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내년 전세가 만기인 집을 매수한 사람들은 정부의 추가 규제에 두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박 모씨는 "여기서 대출 한도 축소 등 규제가 나온다는 소문이 나올 때마다 가슴이 철렁한다"면서 "LTV 40%로 계산해 잔금이 조금 부족해 돈을 더 모았다가 들어가려고 전세를 안고 샀는데 영원히 내 집에 못 들어가게 생겼다"고 하소연했다.
이뿐만 아니라 대출규제의 '사각지대'가 연이어 나오고 있다. 예를 들어 전세자금대출 금지 규정 중 분양권과 입주권이 제외된 부분에 대해 형평성 논란이 일고 있다. 가격 상승을 노린 분양권이나 재개발·재건축 입주권은 놔둔 채, 실거주 목적의 주택 소유자만 잡는다는 비판이 나온다.
지난 16일 정부가 발표한 '전세대출 관련 조치'는 "주택 매매계약만 체결됐거나 분양권·입주권 상태라면 실제 주택 취득 전까지 주택 매입이나 보유로 보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예를 들어 9억원 넘는 분양권·입주권이 있더라도 전세자금대출이 가능하고, 분양권을 2개 이상 보유하더라도 전세자금대출을 이용할 수 있다. 그러나 주택을 두 채 이상 소유하게 되거나, 9억원 넘는 주택을 소유하면 전세대출을 즉각 회수해야 한다. 이 같은 '구멍'이 알려지자 투자자들 사이에서는 "분양권·입주권이야말로 아무런 규제가 없다"며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은다는 뜻)해서 분양권을 사자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전세자금대출이 금지된 이 모씨는 "분양권(입주권)이야말로 실수요와 거리가 멀고, 시세 차익을 위해 전매 가능한 물건만 몰라 사고파는 사람도 많은데, 저런 투기는 그대로 놔두고, 좀 더 좋은 집에 살고 싶어 전세를 안고 매수한 우리 같은 사람만 피해를 보고 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전문가들은 해당 분야로 투자 수요가 몰리는 풍선효과를 우려하고 있다. 양지영 양지영R&C연구소장은 "최근에는 공청회 등 외부 전문가들의 자문 과정 없이 급하게 임기응변식 대책을 내놓다 보니 투기와 관련 없는 실수요자까지 피해를 보는 사례가 발생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선희 기자 / 정지성 기자][ⓒ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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