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해리 왕손과 메건 마클 왕손비가 영국 왕실과 거리를 두고 독립적인 삶을 살겠다고 선언했다.
영국 공영방송 BBC는 '서섹스 공작과 공작부인' 칭호를 가진 해리 왕손 부부가 8일(현지시간) "왕실 '고위(senior)' 구성원에서 한 발 물러나 재정적으로 독립하려고 한다"며 "지난 몇 달 간 고민한 끝에 우리는 왕실에서 새롭고 진보적인 역할을 개척하기 위해 '전환(transition)'을 택하기로 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고 전했다. 이들 부부는 "이번 결정은 지난 몇 년간 여러분들의 격려를 받으며 준비해왔다"면서도 "여왕에 대한 전적인 지지는 계속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해리 왕손 부부는 앞으로 영국과 북미를 오가며 지낼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 의회가 왕실에게 제공하는 왕실교부금을 포기하는 대신에 런던 인근 윈저성에 있는 전용주택 '프로그모어 코티지'에 대한 소유권은 유지한다. 부친인 찰스 왕세자의 콘월 영지에서 나오는 수익도 그대로 받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재정적인 독립을 하려고 하는지에 대해선 밝혀지지 않은 상태"라고 가디언지는 전했다.
해리 왕손 부부가 6주간의 캐나다 휴가에서 복귀하자마자 이번 깜짝 발표를 내놓은 배경에는 언론의 지나친 사생활 보도 경쟁 속에 왕실 구성원들과 불화설이 불거졌기 때문인 것으로 관측된다. 특히 지난해 5월 '혼혈 로열 베이비'인 아들 아치가 태어나면서 취재 경쟁은 더욱 뜨거워졌다. 해리 왕손의 할머니인 엘리자베스 2세 여왕조차도 해당 사실을 사전에 보고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버킹엄궁 대변인은 "이번 결정에 대한 논의는 '조기 단계'에 있다"며 "시간이 걸리는 복잡한 문제"라는 입장을 내놨다.
현지 언론들은 이번 사태를 '메건'과 탈출을 뜻하는 'exit'을 합쳐 '메그시트(Megxit)'라고 부르고 있다. 조니 다이몬드 BBC 왕실특파원은 "이번 사태는 해리 왕손 부부와 왕실 사이에 큰 불화를 나타낸다"며 "버킹엄궁은 '실망'의 반응을 보이고 있고 왕실 고위 구성원들은 '상처'를 받은 상태"라고 전했다. 영국매체 더썬은 "엘리자베스2세 여왕이 사전에 이 사실을 어째서 알고 있지 못했는지 모두가 궁금해하고 있다"며 "여왕은 '화'가 나있지만 찰스 왕세자와 윌리엄 왕손은 '극도의 분노'를 느끼고 있는 상태"라고 보도했다.
영국 왕실과 거리를 두고 독립적인 삶을 살겠다고 8일(현지시간) 선언한 영국 해리 왕손(오른쪽)과 메건 마클 왕손비. [AP = 연합뉴스]
그동안 해리 왕손 부부는 자신들이 느끼고 있는 공적 부담감에 대한 괴로움을 공공연하게 토로해왔다. 메건 왕손비는 지난해 10월 남아프리카 순방 당시 방송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그냥 생존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건 삶의 목표가 아니지 않느냐"며 "살면서 풍요로움과 행복을 느껴야 하는데 지금 내가 하고있는 노력들은 나를 안쪽에서부터 갉아먹고 있다"고 털어놨다. 해리 왕손은 "(언론들의) 카메라를 볼 때마다, 셔터 소리를 들을 때마다 상처가 더 깊이 곪는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해리 왕손의 어머니인 고(故) 다이애나비는 1997년 파파라치의 추격을 피하려다가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다.왕실을 상대로 결별을 선언한 사례가 이번이 최초도 아니다. 영국언론들은 이번 해리 왕손 부부의 발표를 에드워드 8세 때 선언과 비교하고 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큰아버지였던 에드워드 8세는 1936년 미국인 이혼여성 심프슨과 살기 위해 왕위를 포기했다. "사랑하는 여인의 도움이 없이는 왕의 책무를 다할 수 없음을 알았다"며 자신의 행보를 막던 영국 왕실과의 결별을 선언한 사례다.
일각에서는 이번 발표가 왕실 가족의 미래에도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고 보고 있다. 21세기에 걸맞게 영국왕실 또한 몸집을 줄이고 '날씬'해질 필요가 있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이다. 가디언지는 "미성년자 성접대 의혹으로 지난해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힌 앤드류 왕자 사태에 이어 이번 발표가 나왔다"며 "왕실에서 '쇄신' 역할을 맡고 있던 해리 왕손 부부가 이런 결정을 내리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전했다.
[고보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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