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영화 리뷰] `디어스킨`, 사슴가죽에 집착하다가 사슴이 된 남자의 이야기
입력 2020-01-02 11:44  | 수정 2020-01-02 13:07
44세 조르주(왼쪽)는 편집자 지망생 드니스에게 그녀의 꿈을 실현해주겠다고 접근해 돈을 받아낸다. [사진 제공=엠엔엠인터내셔널]

조르주는 우연히 얻게 된 캠코더로 가짜 영화를 찍으며 `재킷을 입은 유일한 남자가 되기`란 꿈에 다가간다. [사진 제공=엠엔엠인터내셔널]
예술엔 돈이 든다. 영화나 미술처럼 장비와 재료가 비싼 분야일수록 더 그렇다. 일본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오에 겐자부로는 장편 '체인지링'에서 이 문제를 다룬 바 있다. 극중 소설가 고기토는 온갖 굴욕을 견디고 살아남았지만 영화감독 고로는 자살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소설가는 직업이 아닌 일종의 정체성에 가깝지만, 남의 투자를 유치해야 하는 영화감독은 정체성만으로는 생존할 수 없다'고. 해당 소설에선 영화감독을 예시로 삼았지만, 사실 누군가의 선택을 받아야 하는 예술가 모두가 가진 고민일 것이다.
최근 개봉한 '디어스킨'은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하는 예술가를 과연 예술가라고 칭할 수 있는지, 이 해묵은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영화다. 감독은 해답을 발견하기 위해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고자 하는 한 남자를 따라간다. 일종의 사고실험이라고 할 수 있겠다. 주인공인 44세의 조르주는 모든 재산을 털어 100% 사슴가죽으로 된 재킷을 산 뒤 새 옷을 입은 자기 모습에 반해버린다. 급기야는 "이 세상에서 재킷을 입은 유일한 사람으로 남고 싶다"는 불가해한 나르시시즘에 사로잡히기에 이른다.
그가 이를 실현하는 수단은 바로 영화감독 행세를 하는 것. 자신이 든 캠코더로 가짜 영화를 찍으며 세상 사람들의 재킷을 하나씩 벗겨 나간다. "저는 재킷을 다시는 입지 않겠습니다"란 선언을 담는 작품을 찍는다며 연기자 지망생과 행인들을 속이는 것이다. 그는 영화 촬영 후 재킷을 돌려달라는 요청을 무시한 채 도주하고, 때로는 사람을 잔인하게 살해하며 자신의 꿈에 천천히 다가선다.
나르시시즘에 빠진 조르주의 필름에는 주로 자신의 `셀카`가 담긴다. [사진 제공=엠엔엠인터내셔널]
사슴가죽 재킷을 입은 조르주가 창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넋이 나가 있다. [사진 제공=엠엔엠인터내셔널]
흥미로운 지점은 가짜 감독 조르주가 찍은 결과물이 나쁘지 않다는 것이다. 영화 편집자로 성공하길 원하는 웨이트리스 드니스는 조르주의 촬영 원본에서 걸작의 가능성을 엿본다. 필름 값으로 지나친 액수를 요구하는 그에 대한 의심을 거두고 적극적인 투자에 나선다. 정작 조르주 본인은 그에게 얻은 돈을 사슴가죽 신발을 사는 데 쓰지만 말이다.
예술가가 되기 위한 필수조건에 대해 영화는 다음과 같은 답을 내리는 듯하다. 그것은 재능도 자본도 아닌 유일한 존재가 되고자 하는 욕망이라고. 편집자 드니스가 조르주의 영상물을 보며 놀란 건 그것이 테크닉적으로 아주 뛰어나거나, 명배우가 출연한 작품이어서가 아니다. '이 세상에서 재킷을 입은 최후의 존재'가 되고자 하는 욕구가 그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영상을 만들어낸 것이다.
조르주는 재킷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종종 재킷과 대화하기도 한다. [사진 제공=엠엔엠인터내셔널]
장 뒤자르댕(왼쪽)과 아델 에넬은 다소 황당한 이 영화의 설정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뻔뻔한 연기`의 진수를 보여준다. [사진 제공=엠엔엠인터내셔널]
이 영화는 계획과 실행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많은 영화감독 지망생이 집 안에서 자신의 꿈을 실현할 계획을 짜는 동안, 영화감독이 될 생각도 없었던 조르주는 일단 찍고 봤다. 어떻게든 완성된 결과물은 걸작과 망작이 될 가능성을 모두 지니고 있지만, 계획만 해서는 망작조차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재미난 영화다. 물론 그 재미는 '백두산'이나 '겨울왕국2'에서 느껴지는 즉각적인 쾌감은 아니고, 요르고스 란티모스나 데이빗 크로넨버그처럼 영화를 생각 실험의 수단으로 삼는 감독의 작품에서 전달되는 종류의 것이다. '아티스트'로 2012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장 뒤자르댕과 프랑스 대세 배우 아델 에넬은 다소 황당한 이 영화의 설정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뻔뻔한 연기력을 선보인다. 청소년 관람불가.
[박창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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