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VR 고글` 쓴 정의선의 `디자인 경영`, SF영화를 현실로
입력 2019-12-18 15:26  | 수정 2019-12-18 15:30
버추얼 개발 프로세스 [사진 제공 = 현대차, 기아차]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수석부회장의 '디자인 경영'이 VR(가상현실)과 만나 SF(공상과학)영화를 현실로 만들었다.
VR을 활용한 현대차·기아차의 디자인·설계 능력은 신차 개발 비용과 시간을 단축시켜 소비자들의 까다로운 입맛을 충족시켜주는 것은 물론 미래차 개발 능력도 향상시킬 것으로 전망된다.
정 수석부회장은 2005년 기아차 대표이사를 맡으면서 '디자인 경영'을 강조했다. 현대차와 기아차의 약점이 디자인에 있다고 판단해서다. 그는 디자인 수준을 높이기 위해 세계적인 디자이너들을 영입했다.
2016년 현존 세계 3대 자동차 디자이너인 피터 슈라이어를 시작으로 루크 동커볼게, 이상엽, 사이번 로스비, 서주호, 카림 하비브 등을 잇달아 수혈했다.

현재 현대차그룹 디자인은 동커볼게 부사장이 총괄하고 있다. 폭스바겐에서 근무한 사이먼 로스비 상무가 현대스타일링 담당을, GM·BMW를 거친 서주호 상무가 현대디자인이노베이션을 맡고 있다. 현대차 디자인센터장은 이상엽 전무다. 닛산 인피니티와 BMW 디자인을 주도한 카림 하비브 전무는 기아디자인센터장으로 근무중이다.
정 수석부회장의 디자인 경영에 힘입어 디자인 연구개발비도 늘어났다. 전체 연구개발비의 15~20%를 디자인에 사용한다. 현대차·기아차가 지난해 연구개발비로 4조4200억원을 사용한 것을 감안하면 6000억~9000억원을 디자인 연구개발비로 썼다는 뜻이다.
디자인 경영은 현대차·기아차 디자인에 대한 호평으로 이어졌다. 올해도 1월부터 상복이 터졌다.
현대차·기아차·제네시스가 선보인 르 필 루즈, 싼타페, 코나, 쏠라티 무빙 스튜디오, K3(현지명 포르테), K9(현지명 K900), 에센시아 콘셉트, G70 등 8개 차종은 지난 1월 '2018 굿디자인 어워드'에서 운송 디자인 자동차 부문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현대차 팰리세이드와 기아차 씨드는 세계 3대 디자인상 중 하나인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에서 수송 디자인 분야에서 본상(winner)을 수상했다.
현대차 신형 쏘나타는 글로벌 격전지인 미국에서 우수한 디자인 품질을 인정받았다. 미국의 유명 자동차매체 잘롭닉은 "신형 쏘나타가 정말 멋지게 보인다. 낮고 넓어진 데다 길어지기까지 하면서 그 어느 때보다 날렵한 느낌을 주고 있다"고 보도했다.
미국 유력 자동차매체 모터트렌드도 "현대 쏘나타가 눈에 띄게 고급스러워 보인다. 안팎으로 성숙한 디자인이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올렸다. 카앤드라이버 역시 신형 쏘나타에 대한 기사에서 "디자인으로 다시 한 번 거대한 도약을 이뤘다"고 평가했다.
버추얼 개발 프로세스 [사진 제공 = 현대차, 기아차]
정의선 부회장의 디자인 경영은 현재도 진화중이다. 진화를 이끄는 새로운 동력원은 'VR(가상현실'이다. 현대차·기아차는 VR 기술을 활용한 '버추얼 개발 프로세스'를 지난 17일부터 본격 가동했다.
버추얼 개발은 다양한 디지털 데이터를 바탕으로 가상의 차 모델이나 주행 환경 등을 구축, 실제 부품을 시험 조립하면서 차를 개발하는 과정을 대체한다. 디자이너가 원하는 대로 디자인을 바꿔 품평까지 진행할 수 있다. 실물 시제작 차에서 검증하기 어려운 오류도 빠르게 확인하고 개선할 수 있다.
현대차·기아차는 버추얼 개발 프로세스를 연구개발 모든 과정에 완전 도입할 경우 신차 개발 기간은 20%, 개발 비용은 연간 15% 정도 줄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기아차는 플래그십 세단인 K9를 개발할 때 4년5개월 동안 5200억원을 투입했다. 버추얼 개발 프로세스를 활용하면 연구개발 기간을 10개월 가량 단축할 수 있고, 비용은 780억원 가량 절감할 수 있다는 뜻이다.
소비자 니즈에 맞춰 부분변경 모델이나 완전변경 모델을 좀 더 빨리 내놓을 수 있게 된다. 또 절감한 시간과 비용을 제품 품질을 높이는 데 사용할 수도 있다. 기존에 없었던 새로운 형태의 미래 모빌리티를 개발할 때도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다.
현대차·기아차는 VR 디자인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지난 3월 150억원을 투자, 세계 최대 규모의 최첨단 VR 디자인 품평장을 완성했다. 가로·세로가 각각 20m에 달하는 공간에서 20명이 동시에 VR을 활용해 디자인을 평가할 수 있다.
평가자들은 가상의 공간에서 디지털로 제작된 차량을 바라보면서 리모컨을 닮은 조작기기를 통해 차량 부품, 재질, 컬러 등을 바꿔보며 디자인을 살펴볼 수 있다.
실물과 크기가 같거나 축적을 적용한 모형인 '목업(Mockup)'을 제작하지 않아도 디지털 차량을 통해 어떻게 디자인됐는지, 개선할 점은 없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목업을 제작할 수 없는 단계에서도 디지털 차량을 적용해 결함 발생 가능성을 낮추고 완성도를 높일 수 있다.
VR 디자인 품평 장면 [사진 출처 = HMG저널]
실제 현대차·기아차는 지난 10월 공개한 수소 전용 대형트럭 콘셉트카 넵튠의 최종 디자인 평가부터 VR 디자인 품평장을 시범 운용했다.
품평회에 참가하려면 VR 고글을 쓰고 백팩 형태의 컴퓨터를 착용해야 한다. 품평장 천정에는 36개의 모션캡처 센서가 설치됐다.
센서는 평가자의 위치와 움직임을 1mm 단위로 감지한 뒤 백팩 컴퓨터를 통해 평가자에게 제공한다. 고글을 통해서는 영화 '아이, 로봇'에 나온 인공지능 로봇의 상체를 닮은 아바타가 곳곳에 나타난다. 다른 평가자들이다.
앞을 바라보면 넵튠과 테슬라 전기트럭인 세미, 메르세데스-벤츠 악트로스 등 트럭 5대가 서 있는 장면이 보인다. 리모콘처럼 생긴 VR 컨트롤러의 버튼을 누르자 넵튠이 참가자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온다. 평가자들은 넵튠의 내외부 디자인을 살펴볼 수 있다.
정 수석부회장 등 최고 경영진들도 매달 VR 디자인 품평장을 찾아 VR 고글을 쓰고 신차 디자인을 직접 확인한다. 지난주에는 그랜저 후속 모델 디자인 개발 회의도 열렸다.
현대차·기아차는 지난해 6월 VR을 활용한 설계 품질 검증 시스템도 구축했다. 차량 설계 부문에서 3차원 설계 데이터를 모아 디지털 차량을 만들고 가상의 환경에서 안정성, 품질, 조작성 등 설계 품질을 평가한다.
이 시스템을 통해 실제 차와 완전히 일치하는 가상의 3D 디지털 차량을 만들 수 있다. 기존에도 2D 디지털 차량이 있었다. 그러나 큰 화면을 통해 2D 환경에서 주행 화면을 보는 것에 불과, 차량 성능을 정밀하게 검증하기 어려웠다.
새로 구축한 VR 설계 품질 검증 시스템은 자동차 운행 환경까지 가상으로 구현할 수 있다. 부품 간의 적합성, 움직임, 간섭, 냉각 성능 등을 입체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연구원들은 디지털 차량을 가상현실에서 운행하면서 VR 컨트롤러로 움직이는 차량을 절개, 엔진의 움직임이나 부품의 작동 상황을 살펴볼 수 있다. 차체 바닥으로 흐르는 공기의 움직임도 눈으로 볼 수 있다.
실제 차량에서 불가능했던 검증이 가능해져 실물 평가보다 더 빠르고 정확하게 개발 차량의 문제점이나 개선 사항을 파악한 뒤 설계에 반영할 수 있게 됐다.
이밖에도 VR 설계 품질 검증 프로세스를 통해 고속도로, 경사로, 터널 등 다양한 가상 환경 주행을 통해 안전성을 검증할 수 있다. 도어, 트렁크, 후드, 와이퍼 등 각 부품의 작동 상태도 분석할 수 있다. 운전석의 공간감과 시야, 연료소비효율 향상을 위한 차량 내외부 공력성능, 조작 편의성 등도 가상으로 검증할 수 있다.
VR 설계 품질 프로세스는 영화 '아이언맨'이나 '어벤져스'에서 주인공 토니 스타크(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분)가 3차원 디지털 이미지로 아이언맨 슈트 설계도를 살펴보면서 수정하고 실제 착용했을 때 모습을 디지털 이미지로 확인하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VR 디자인 품평 장면 [사진 출처 = HMG저널]
현대차·기아차의 VR 버추얼 개발 프로세스는 글로벌 자동차 브랜드들이 도입한 'CAVE'보다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CAVE는 '컴퓨터 자동 가상 환경(Computerized Automatic Virtual Enviroment)'의 약자다.
인공으로 만들어낸 가상의 특정한 공간·환경·상황에서 인간의 오감을 자극해 실제와 유사한 공간·시간 체험을 제공하는 VR를 활용한 신차 개발 시스템이다. VR에 가장 적극적인 브랜드는 르노, 만(MAN), BMW, 포드, 메르세데스-벤츠다.
CAVE는 3D 구현 시스템과 슈퍼컴퓨터를 통해 모든 데이터를 실물 크기로 보여준다. 사방이 막히고 깜깜한 공간에서 작업이 이뤄지기 때문에 CAVE가 있는 공간을 사전 뜻처럼 '동굴(케이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CAVE 공간의 폭과 높이는 각각 4m 정도다.
CAVE를 가동하면 VR 안경을 착용한 개발자가 차체 내부를 표현한 영상 속으로 들어간다. 개발자가 작은 안테나가 달린 TV 리모컨을 닮은 컨트롤러를 잡으면 손 모양이 화면에 나온다.
리모컨 기기를 공구 쪽으로 대면 손이 공구를 잡는다. 다시 부품에 가까이 가져간 뒤 클릭 버튼을 누르면 부품이 공구에 잡힌다. 손을 좌우로 움직이며 차체 한곳에 부품을 놓으면 조립이 이뤄진다.
현대차·기아차도 CAVE 시스템을 2012년부터 운영했다. 하지만 좁은 공간 때문에 한명이 주로 작업을 한다. 디자이너들이나 설계자들이 서로 협업하면서 의견을 나누고 개선작업을 펼치기엔 한계가 있다.
현대차·기아차도 이에 200억원 가량 투입한 CAVE를 없애고 버추얼 개발 프로세스를 도입했다.
현대차·기아차는 유럽, 미국, 중국, 인도 등지에 있는 디자인센터에서 근무하는 디자이너들을 가상공간에 모아 협업하는 원격 VR 디자인 평가 시스템도 구축한다. 영화 '킹스맨'에서 안경만 착용하면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요원들이 회의실 의자에 앉은 모습으로 나타나는 홀로그램 회의 장면이 현실이 되는 셈이다.
또 아이디어 스케치와 같은 초기 디자인 단계에도 VR 기술을 확대 적용, 디자인 경쟁력을 높여나갈 예정이다. 아울러 실제 모델에 가상 모델을 투영시켜 몰입감을 높여주는 AR(증강현실) 기술을 도입, 버추얼 개발 프로세스를 한 단계 더 진화시킬 계획이다.
[화성=디지털뉴스국 최기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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