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74년이 지나 올린 마이즈루만의 위령제
입력 2019-11-08 10:19 
우키시마호 사건으로 돌아가신 유해 일부를 보관하고 있는 일본 도쿄 유텐지에서 김홍걸 민화협 대표상임의장이 참배를 하고 있다.

유족들이 '죽음의 바다'로 모였다. 74년의 세월이 흘러 마주한 그 바다는 잔인할 정도로 평온했다.
일본의 2차 대전 직후 한국인 강제징용 희생자 수천명을 태운 귀국선 우키시마호가 지난 1945년 8월 24일 오후5시께 일본 근해 마이즈루만 안에서 폭발사고로 침몰했다. 각종 기록에 따르면 당시 사고로 조선인 40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4일 그 곳에서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과 우키시마호 희생자 유가족들이 추도제를 열었다. 이번 추도제에는 민화협을 비롯해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관계자 등이 참석했다.
우키시마호 폭침 한인 희생자 추도제에 참석한 유족대표와 관계자들이 추도제를 마치고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김홍걸 민화협 대표상임의장은 "우키시마호 영령들은 억울하게 돌아가신 후에도 일본정부의 사과나 배상도 받지 못하고 유골도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상황"이라며 "사과나 배상만 요구할 것이 아니라 강제동원 진상을 널리 알리고 유골을 찾아내 고국땅으로 모시자는 생각에서 이 일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당시 사고로 아버지를 잃은 김영채 씨(75)는 부친 사망 이후 30년이 지나서야 유해를 받아들 수 있었다고 말했다. 또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나서야 천안 망향의 동산에 고인의 유해를 모실 수 있었다고 토로했다.
그는 10살이 갓 넘어서야 아버지가 당시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김 씨는 불과 2살 무렵이었다.
그는 이 사실을 신문지면에서 비로소 확인할 수 있었다고 했다. 군 복무를 마친 1968년 즈음 강제징용 등으로 목숨을 잃은 이들 5000여명의 합동 위령제를 지냈다는 보도가 나왔다. 그는 신문자료를 뒤져서 아버지를 명단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그걸 근거자료로 당시 외무부와 보사부(현 외교부·보건복지부)로부터 희생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고 했다.

김 씨는 "앞바다가 해안가에서 지척이라는 것을 여기에 와서 직접 보니까 더욱 참담한 기분"이라고 말했다. 유족대표 김진국 씨는 "일본은 그들의 만행에 대해 진정어린 사과는 커녕 인정을 하지도 않고 있는 현실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고 비판했다.
지난 1945년 8월 15일 일본 패전 직후 아오모리 현 오미나토 해군경비부는 오미나토 지구 방공호, 비행장·철도 건설에 동원했던 조선인에게 귀환할 것을 지시하고 우키시마호에 승선시켰다. 당시 시모키타 반도에 철도건설이 결정되면서 강제징용된 조선인들이 이곳으로 와서 일하게 됐는데 이들을 태운 배가 침몰한 것이다.
쓰가루 해협을 방위하는데 필요한 군사용 철도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강제징용된 한국인에게 비인도적인 노동이 가해지기도 했다. 승선자는 적게는 4000명 많게는 7000명에 이르기까지 의견이 갈린다.
일본 교토부 마이즈루만의 모습. 이곳에서 지난 1945년 8월 24일 우키시마호가 침몰해 조선인 4천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사진 = 김정범 기자]
부산으로 향하던 배는 해안선을 따라 남하하다가 예정된 항로에서 벗어나 마이즈루로 방향을 돌렸다. 우키시마호는 그 해 8월 24일 오후 5시께 마이즈루만에 천천히 들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쾅"하는 엄청난 폭음과 함께 배가 두동강 나면서 가라앉았다고 한다. 교토부 마이즈루만에서 갑작스러운 폭발로 침몰한 것이다. 인양된 사체는 인근 해안과 마이즈루해병단 부지에 임시로 매장됐다.
'우키시마호 폭침사건진상'이라는 책을 펴낸 사이토 사쿠지 씨는 "시모키타 항구에서 출발한 배는 부산으로 향할 예정이었지만 항로를 벗어나 마이즈루만 근처로 향했고 사고가 발생했다"고 책에 썼다.
우키시마호에 탑승자이자 생존자인 충북 영동출신 박재하 씨는 이 책에서 "마이즈루만에서 폭발 소리가 나기 전 무슨 목적인지는 몰라도 고무보트를 내리는 것을 보았다"면서 저녁 무렵 갑자기 쿵하는 소리와 함께 몸이 1미터나 튀어올랐다"고 전했다.
또 다른 생존자인 한세열 씨는 "일본 해군들이 회의를 한다고 배 아래로 내려가라고 소리쳤다 그 때 요란한 폭발소리를 내면서 배가 두 동강이 났고 가라앉기 시작했다"면서 "그때 장인과 장모 아내를 모두 잃었다. 당시 이 군함이 부산항을 거쳐 오키나와에 있는 미군에게 넘기기 위해 향한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당시 일본의 해상 사고 가운데 가장 큰 사고였음에도 일본정부는 사건 진상 조사를 포기했다. 이후 우키시마호는 9년이 지난 1954년 10월 이노중공업주식회사라는 회사에 2500만엔에 낙찰돼 인양됐다.
당시 상황을 오사카 국제신문이 보도했다. 보도에서 해당 신문은 "촉뢰에 의한 침몰이라면 선체의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구멍이 뚫려있어야 하는데 인양한 배의 바닥 구멍은 바깥방향으로 뚫여 있었다"면서 "생존자들은 침몰 직전 폭발소리를 세번 연속들었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었다. 촉뢰(기뢰)에 의한 것이라면 이런 현상은 있을 수 없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우키시마호는 침몰했다"는 간단한 자료만 남겼고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마이즈루만에는 희생자들을 위한 위령탑이 있다. 일본인 요에 카쓰히코 씨가 추모 유족회 회장을 맡으며 이 비를 건립했다. 조각된 희생자들의 시선은 끝내 밟지 못했던 고국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이즈루 = 김정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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