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이란이 영국 유조선을 나포하자 미국이 이란 견제 병력을 추가 배치한 데 이어 영국이 이란 경제 제재를 검토 중이라는 소식이 전해지는 등 '호르무즈 해협'을 둘러싼 중동 정세 안개가 짙어지고 있다. 20일(현지시간) 모하마드 자바드 자리프 이란 외무장관과 통화한 제러미 헌트 영국 외무부 장관은 오는 21일 이란에 대한 경제적·외교적 제재 방안을 발표할 예정이라고 현지언론 더텔레그래프가 보도했다.
앞서 19일 이란 혁명수비대는 '불법 항해'를 이유로 영국 유조선 '스테나 임페로 호'를 나포해 억류 중이며 필요한 법적 절차를 밟기 위해 당국에 인도했다고 이날 FARS통신을 통해 밝힌 바 있다. 이번 억류는 앞서 4일 영국 왕립 해병대가 영국령 지브롤터 해협에서 '유럽연합(EU) 제재 위반 혐의'를 이유로 이란 유조선 '그레이스 1호'를 억류한 데 따른 이란 측 보복이다.
20일 영국 헌트 장관은 이란 지라프 장관과 통화에서 "일주일에 통화할 때 이란이 긴장 완화를 원한다고 했는데 정반대로 행동한 것에 대해 극히 실망했다"는 항의 의사 표시와 더불어 억류된 영국 유조선 석방을 요구했다고 트위터를 통해 밝혔다.
18일 미국 뉴욕에서 열린 유엔 회의 참석 직후 '비동맹연합(MNOAL·강대국 일방주의 반대 국가 모임) 연례 행사' 참석차 베네수엘라 카라카스를 방문 중인 자리프 장관은 20일 헌트 장관과 통화 후 "영국은 미국의 경제 테러 악세서리가 되는 것을 그만두라"고 트위터를 통해 맞받아쳤다. 이어 그는 "이달 4일 영국이 자국령 지브롤터 해협에서 이란 유조선을 억류한 것은 해적 행위였지만, 19일 이란의 영국 유조선 억류는 국제 항해규칙에 따른 것"이라면서 "이란은 뉴욕 회의 때 페르시아 걸프만과 호르무즈 해협 안전을 보장한다고 분명히 했다"고 덧붙였다.
이란과 영국은 스테나 임페로 호가 국제 항해 규칙상 '무해통항(innocent passage) 원칙'을 위반했는 지 여부를 두고 서로 다른 주장을 하며 갈등 중이다. 19일 이란 당국은 "스테나 임페로호가 선박자동식별장치(AIS)를 끈 채로 역주행하면서 당국 경고를 무시한 데다 이란 어선과 충돌한 뒤 무단으로 달아나려 해 무해통항 원칙'을 위반했다"고 주장한 반면 영국은 "이란이 자국 영해가 아닌 오만해역에서 스테나 임페로 호를 억류했다"고 반박했다. 무해통항 원칙이란, 외국 선박이 특정 국가의 안전과 평화, 이익 등을 해치지 않는 한도 내에서 해당 국가 영해를 자유 항행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영국과 미국, 이란 간 갈등은 지난해 미국 도널드 트럼프 정부가 일방적으로 이란 핵협정(JCPOA·포괄적 공동행동계획)을 탈퇴 후 올해 초부터 이란 경제 제재를 강화한 것이 결정적 계기다. 트럼프 정부는 경제 제재 외에 지난 4월 8일 이란 정예군인 혁명수비대(IRGC)를 '외국 테러조직'으로 지정해 이란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다만 이란은 미국 제재에 반발해 JCPOA의 또다른 당사국인 유럽 3국(영국·프랑스·독일)의 중재 역할을 강조해왔다. 다만 유럽 국가들과의 대화도 여의치 않게 끝나자 이란은 "JCPOA 서명국들이 미국의 일방적인 이란 제재에 대해 행동에 나서지 않으면 60일마다 합의 이행을 줄여나갈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단계적으로 합의 이행을 깨왔다. 2015년 체결된 JCPOA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5국·미국, 프랑스, 영국, 러시아, 중국)과 독일이 서명 당사국이다.
19일 유조선 억류 이후 영국은 이란과의 핵협정(JCPOA)에 따라 2016년 해제했던 이란 자산에 대한 동결조치를 부활하는 방안을 유럽연합(EU)과 유엔에 요구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외무부는 안토니오 구테레스 유엔 사무총장에게 "우리는 이란과의 대립을 원치 않지만 현재 긴장 상태는 극도로 심각하다. 우리 유조선을 억류한 이란의 간섭은 불법"이라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 미국도 이란 견제에 나서면서 국방부가 '중동지역 안보'를 이유로 19일 사우디아라비아에 병력 추가 배치를 공식 발표했다. 병력 일부와 패트리엇 방공 미사일 시스템 일부가 이미 사우디 프린스 술탄 공군기지에 도착했다고 미국 AP통신이 보도했다. 이는 지난 달 국방부가 발표한 1000명 추가 파병 계획 일환이며 사우디 파견은 500명 규모라고 로이터 통신이 전했다.
한편 영국·미국과 이란 간 긴장이 고조된 가운데 영국 대형 항공사인 브리티시에어웨이가 돌연 "안전 상 이유로 이집트 카이로 행 운항을 1주일 간 중단한다"고 20일 발표했다. 독일 루프트한자도 일시 중단을 선언했다. 두 항공사가 자세한 사유를 밝히지 않았지만 이집트 反정부 테러 위협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19일 영국 정부는 "이집트 시나이 반도와 나일 밸리 일대 여행에 주의해야하며 특히 비행기 테러 위협이 있다"고 경고했고 같은 날 미국 국무부도 "이집트로 가는 민간 항공기에 대해 반(反)정부 단체들의 폭력적 테러 위험이 있다"고 한 바 있다.
[김인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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