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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간 세법 600여건 몰아치기 심사…정부안 80% 그대로 통과
입력 2019-07-15 17:58  | 수정 2019-07-15 19:58
지난 6월 국회에서 기획재정위원회 전체회의가 열렸지만 야당인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불참하면서 회의가 공전하고 있다. 당시 야당의 국회일정 보이콧으로 인한 것이다. [사진 제공 = 연합뉴스]
◆ 포퓰리즘에 누더기 된 세제 / ② 능력도 의지도 없는 국회 ◆
수백 개 안건을 한 달 안에 '몰아치기' 심사하는 한국 국회의 세법 개정 방식은 온갖 폐해를 양산하고 있다. 법안을 제대로 볼 시간이 없어 정부가 낸 개정안은 80% 넘게 그대로 통과되고, 토론할 시간이 부족해 밀실협의인 '소소위원회'에서 합의되는 개정안이 부지기수다. 그 결과 세수를 수백억 원, 수천억 원대로 흔드는 세법 개정이 납세자들도 모르는 사이에 무더기로 통과되고 있다.
지난해 세법 개정을 논의하기 위해 모인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에서도 같은 현상이 반복됐다. 지난해 12월 2일에는 각종 투자 관련 세액공제의 일몰연장 법안 5개를 내용 검토도 없이 소소위로 넘기자는 의견이 나오자, 추경호 자유한국당 의원이 "어떤 제목이 있는지라도 좀 보고 넘기자"고 해 형식적인 토론이 몇 마디 오간 뒤 법안들이 밀실협의로 이관됐다. 이때까지도 정기국회 절차의 첫 단계인 기재위 조세소위조차 통과하지 못해 법안을 넘기는 데 급급했던 결과다.
소소위 논의는 정보가 공개되지 않는다는 문제도 있지만 여야가 세법을 정책 주고받기의 협상 카드로 활용하기 쉬워진다는 것이 더 큰 문제다. 가령 2017년 12월 더불어민주당·한국당·국민의당 3당 원내대표는 정부 원안인 공무원증원 예산(5349억원)을 삭감하는 대신 법인세 최고세율 인상(22%→25%)을 받아들였다. 법인세 최고세율이 얼마가 적정한지 따져보지도 않고 정쟁 해결의 도구로 활용한 것이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연말에 다뤄야 할 세법이 수백 가지가 되기 때문에 의원들이 이를 전부 볼 수가 없다. 실제로는 기재위 전문위원들이 중요한 걸 30~40개 정도 추린 다음에야 몇 가지 중요 세법을 두고 논의를 한다"고 전했다. 정부가 법안을 대부분 만들면 기재위 전문위원들이 검토보고서를 만드는 데 시간이 많지 않기 때문에 의원들이 검토보고서 의견을 거의 그대로 따라간다는 얘기다. 실제로 지난해 정부가 발의한 개정안건과 의원 발의 법안을 모두 합치면 총 600건이 넘는 규모인데, 이를 25일 내에 모두 처리해야 하는 탓에 논의조차 안 된 법안이 부지기수다. 정부가 제출한 246개의 세법개정안 중 202개(82.1%)가 그대로 통과됐다.
반면 의원들이 제출하는 세법개정안의 통과율은 통상 20% 수준이며, 20대 국회는 15일 현재 기준 통과율이 17.0%에 그치고 있다. 한 기재위 의원실 관계자는 "법안 발의개수를 의정활동의 잣대 중 하나로 평가하는 문화가 확산되며 숫자만 조금씩 바꾼 무의미한 의원발의 법안이 양산되고 있다"며 "의원안 가운데 정부발의안과 유사한 것들은 '대안반영폐기' 처리돼 통과된 법안으로 취급받는다. 이런 법안들까지 합쳐 20% 수준의 통과율을 보이는 것이어서 실질적인 통과율은 훨씬 더 참담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국회가 세법을 날림으로 심사할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원인은 세계 유일의 정기 국정감사제도다. 국가 재정 운용의 한 축을 담당해야 할 기획재정위원회조차 '정치쇼'인 국감에 매년 20여 일을 꼬박 소모한다. 지난해 역시 심재철 한국당 의원의 폭로 논란과 1년 넘게 공회전하고 있는 소득주도성장 공방이 세제 이슈를 집어삼켰다. 작년에는 특히 통계청의 가계동향조사 예산 증액(130억원) 여부를 놓고 여야가 다투느라 기간이 더 줄어들었다.
홍기용 인천대 경영학과 교수는 "정쟁과 호통만 난무하는 국정감사에 시간을 허비하느라 한국 국회는 정부 세법 개정작업의 통과의례 수준으로 전락하고 말았다"며 "공부가 안 된 의원들이 정부 논리에 제대로 대응을 못하는 경험이 쌓이다 보니 국회의 실질적 권한도 점차 작아지는 추세"라고 분석했다.
한국 국회가 세법 개정작업을 기재위에 몰아둔 것과 달리 선진국 국회는 법안과 관계된 다른 위원회 논의가 활발한 것이 특징이다. 이동식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독일의 경우 예를 들어 농업 분야의 세제개편은 국회의 농업 관련위원회 논의를 거쳐 세법을 다루는 금융위원회로 넘어온다"고 설명했다. 반면 한국에서는 법안을 제출한 다른 상임위 의원조차 기재위 회의에 참석할 수 없는 실정이다.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소속 의원실 관계자는 "기업활력 대책으로 세제혜택을 주는 법안을 여러 개 발의했지만 기재위 논의가 어떤 분위기로 흘러가는지, 통과 가능성이 있는지 모두 감감무소식"이라고 하소연했다.

또한 미국·영국 등 선진국에서는 국회가 예산과 세정운용에 있어 정부에 준하는 수준의 책임과 권한을 행사하고 있다. 한국 국회의원들이 협소한 법조문을 고치는 개정안만 남발하는 것과 상반된 모습이다. 청와대가 지난해 3월 개헌안에 '예산 법률주의'를 포함시킨 것도 선진국처럼 세입·세출 예산편성 과정에서 국회의 기능을 강화한다는 취지였다.
예산 법률주의는 예산이 '법률안' 형태로 제출되는 것을 뜻한다. 이 경우 국회에서 법조문을 추가하는 방식으로 정부의 세입·세출 운용을 세밀하게 조종할 수 있다. 현재 한국은 정부가 쓴 '예산안'에 국회가 부대의견을 추가하는 수준이어서 강제성이 크지 않다. 안창남 강남대 세무회계학과 교수는 "예산 법률주의가 도입되면 한국의 의원들도 선진국 국회처럼 세입·세출 전반을 아우르는 시야로 세법을 다뤄야 한다. 단순한 보여주기식 입법이 줄어들어 세법 운용을 안정시킬 수 있는 방안"이라고 설명했다. 일본 메이지(明治) 헌법의 유산으로 비법률주의를 택하고 있는 한국과 달리 서구 국가 상당수가 예산 법률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김태준 기자 / 문재용 기자][ⓒ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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