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때 캠퍼스 안에서 줄지어 다니는 오리 몇 마리를 종종 마주쳤다. 오리들은 학교에 터를 잡고 지냈다. 마땅한 집 한 채 없이 떠돌아다니는 게 안쓰러워 두어 번 정도 물그릇을 챙겨줬다. 어느 날 학식을 먹고 배를 두드리며 교정을 지나가던 중 쉬고 있는 오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날 메뉴는 부추 무침을 곁들인 오리고기였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영화 '내 아내의 모든 것'에서 나온 임수정의 대사가 떠올랐다. "양한테 먹이 주고 쓰다듬더니 목장 아래서 양꼬치 구이 사 먹는 인간의 위선이란…"
이 일이 있고 난 뒤로 한동안 고기를 먹을 때마다 모종의 죄책감에 시달렸다. 같은 이유는 아니겠지만 최근 미국이나 유럽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육식 대신 채식을 택하는 이들이 부쩍 늘고 있다. 한국채식연합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약 100만~150만 명이 채식 인구로 추정됐다. 우리나라 전체 인구 2~3%에 해당하는 수준이다.
며칠 전 2%에 속하는 동료 인턴기자에게 왜 채식을 하느냐고 물었더니 "동물을 너무 사랑하는데, 동물을 먹는다는 게 어느 순간부터 이상하게 느껴져서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순간 머릿속에 '오리고기 사건'이 스치면서 채식에 도전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비건 메뉴 취급하는 프랜차이즈?…방심은 금물
서브웨이 베지 샌드위치(왼쪽)와 본죽 6가지 야채죽(오른쪽)[사진= 이유현 인턴기자]
지난 16일부터 18일까지 3일간 '비건'으로 살았다. 비건은 완전한 채식을 의미한다. 우유와 유제품만 허용하는 '락토', 달걀만 허용하는 '오보', 우유·유제품·달걀 모두 먹는 '락토 오보' 등 채식에도 정도에 따라 다양한 종류가 있지만 기왕 하는 김에 최고 난도인 비건을 택했다."'고기 덕후'인 네가 3일이나 할 수 있겠냐"며 약올리는 동료들에게 큰소리를 쳤지만 식단을 정하는 것부터 난관이었다. 고기반찬이 빠지지 않는 구내식당은 자연스레 선택지에서 제외됐다. 익숙한 메뉴로 채식과 가까워져 보기 위해 샌드위치 프랜차이즈 전문점 '서브웨이'와 죽 전문점 '본죽'으로 채식을 시작했다.
점심시간 사전에 공부한 대로 하티빵에 후추·레드와인 식초·옐로우 머스터드를 넣은 베지 샌드위치를 주문했다. 자료는 서브웨이 미국지사에서 주기적으로 공개하는 원재료 표(2019년 2월 기준)를 참고했다. 달걀은 물론 우유와 유제품까지 제외해야 하기 때문에 성분표를 꼼꼼하게 살피는 것이 중요했다.
고작 한 끼지만 비건에 꽤 가까워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퇴근 후 본죽에서 사온 6가지 야채죽을 꺼냈다. 제공되는 반찬을 보자마자 '아차' 싶었다. 장조림은 물론 젓갈이 들어간 김치도 먹을 수 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었다. 동치미 하나만을 반찬삼아 야채죽 한 그릇을 비우는 건 꽤 힘든 일이었다.
◆ 매일 싸는 도시락 힘들다면 '비건 레스토랑'도 방법
두 번째 날은 직접 만든 콩고기 도시락으로 끼니를 해결했다. 3일 중 가장 건강해지는 기분이 드는 식사였다. 다만 준비 과정이 복잡해 먹기도 전에 지친다는 것이 흠이었다. 저녁 도시락을 준비할 생각에 머리를 싸매고 있을 무렵 희소식을 들었다. 채식인들을 위한 식당과 빵집이 있다는 것.
알아보니 비건 레스토랑이 전국에 걸쳐 들어서는 추세였다. 2010년에 비해 지난해 그 수가 2배 이상 늘었을 정도다. 특히 서울 핫플레이스로 꼽히는 상수·망원 등 홍대 일대에 하나둘씩 들어서고 있었다. 몇 개의 후보를 두고 고민하던 중 채식인과 비채식인이 함께 식사를 즐길 수 있다는 한 음식점의 소개 문구를 보고 마음이 사로잡혔다. 비건 체험의 마지막 날을 장식할 한 끼였다.
상수동 '슬런치 팩토리'는 비건부터 페스코·폴로 등 단계별 채식 메뉴를 골고루 판매해 채식의 장벽을 낮춘다. 물론 '논비건'(Non-Vegan)을 위한 메뉴도 함께 구성돼 있어 채식주의자가 아닌 이들과 함께 올 수도 있다. 비건 파스타의 건강하면서도 신선한 맛에 중독돼 흡입하다시피 먹다 보니 '채식주의자는 풀만 먹는다'는 고리타분한 편견이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빈손으로 돌아가기 아쉬워 망원동에 위치한 비건 베이커리 '우부래도'와 비건 디저트 전문점 '더 로 바이 트윈스'에서 빵과 도넛을 구매했다. 두 가게 모두 제품에 우유, 버터, 계란을 넣지 않으며 글루텐 프리를 추구한다. 우부래도 관계자는 "빵 위에 올라가는 소보로 가루 하나도 밀 대신 쌀을 사용하고, 마요네즈도 두유로 만든다"며 "비건뿐 아니라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들이나 아토피가 있는 아이들도 가게를 많이 찾는다"고 설명했다.
◆ 다양한 선택지·높은 가격…부담스럽지만 유의미해
'슬런치 팩토리' 메뉴판에 적혀 있는 채식 소개란(왼쪽)과 '더 로 바이 트윈스'에 세워져있는 비거니즘 팻말 [사진 = 이유현 인턴기자]
"생각보다 먹을 게 많더라고." 비건 생활이 어땠냐는 주변인들의 물음에 이같이 답했다. 실제로 완전 채식인 비건을 택했음에도 예상했던 것보다 선택지가 다양했다. 주변에 흔히 볼 수 있는 프랜차이즈 식당은 물론 일반 레스토랑까지 수용할 수 있는 범위가 꽤 넓었다. 인근 마트에 들어오지 않아 시식에는 실패했지만 롯데푸드의 '엔네이처 제로미트'를 비롯해 식물성 대체육류를 시중에 내놓고 있는 업계도 늘고 있다.문제는 가격이 만만치 않다는 점이다. 직접 구매한 비건 도넛은 개당 5500원으로 프랜차이즈 도넛 전문점에서 도넛 1개와 커피 한 잔을 세트로 사는 가격보다 비쌌으며, 파스타도 1만6000원으로 '가성비' 넘치는 가격은 아니었다. 유기농 재료를 사용하고 대부분 수제로 만든다는 점을 고려해도 부담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가격을 핑계 삼아 3일 만에 비건 체험을 마무리 지었지만, 짧은 시간 동안 스스로에게 작은 변화를 발견했다는 점에서 유의미했다. 신체적으로는 가벼운 몸을 얻었고, 대신 기력을 잃었다. 든든한 고기로 영양분을 보충하고 싶다는 생각을 떨치기 어려웠다.
정신적으로는 평소보다 한껏 예민해졌다. 배고픈 와중에도 먹을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따져가며 성분표를 확인해야 했고, 음식이 식탁에 올라오는 과정부터 곱씹어야 했다. 그 시간이 때로는 피로했지만, 비인도적인 도축 과정을 떠올리다 보면 자연스레 손에서 포크가 내려갔다. 잘 플레이팅 된 음식만 먹기에 급급했던 과거의 모습이 겹쳐지면서 어느 정도의 예민함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물학자 제인 구달은 "인간에게는 동물을 다스릴 권한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를 지킬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개인의 식성이 강요돼서는 안 되지만, 오늘날 몇몇 이들이 고기로부터 벗어나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는 한 번쯤 생각해볼 만하다.
[디지털뉴스국 이유현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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