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세안서 꽃피는 금융한류 (下) ◆
태국 방콕 전철(BTS) 시암역 앞.
열차를 타러 이동하는 길에 삼성전자, 할리스 등 익숙한 간판들이 눈에 들어왔다. 역사 안으로 들어서니 네이버 라인 홍보 부스 앞에서 태국 시민들이 상담을 받고 있었다. BTS를 타고 도착한 딸랏롯파이 라차다 야시장에서는 K팝 음악이 흘러나왔다. 야시장 중심지에는 '헬로 코리아(Hello Korea)'라는 간판을 내건 카페도 보였다. 그러나 유독 한국 금융회사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점포도 없었고 홍보하는 간판도 눈에 띄지 않았다.
동남아시아 2위 경제대국으로 꼽히는 태국은 우리나라 금융사들이 오랜 기간 진출을 꿈꿔왔던 기회의 시장이다. 하지만 현주소는 초라하다. 태국에 진출한 한국의 400개 기업 중 금융사는 3곳에 불과하다. 베트남 35곳, 인도네시아 20곳에 비해 매우 저조한 수치다. 태국 스마트폰 사용자 94%가 네이버 라인 가입자일 정도로 '메이드 인 코리아'의 힘이 커졌지만 여전히 태국 금융시장만큼은 '접근이 어려운 땅'으로 남아 있다.
방콕 사무실에서 만난 뿐안 차이라따나 태국 국가혁신청(NIA) 청장은 "한국이 어떻게 하면 태국의 금융시장에서 더 큰 역할을 할 수 있느냐"고 묻자 망설임 없이 "한국은 필요할 때만 우리를 찾는 것 같다"는 말부터 꺼냈다. 그는 "함께 협업을 해도 일회성(one off)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며 "일본이나 중국과 일을 해보면 실무자든 고위직이든 365일 대화를 이어가는 연속성이 있다"고 평가했다. 함께 배석한 국가혁신청 실무진도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나라 금융사들이 동남아 일대에서 '금융 한류'를 꽃피우고 있지만 이 같은 인식을 가진 사람을 종종 만날 수 있었다. 특히 우리나라 기업들에 대해서 '성급하다'거나 '근시안적'이라고 평가하는 인식이 적지 않다. 동남아에 금융 한류를 완전히 정착시키려면 이 같은 혹평을 호평으로 뒤집는 '인식의 전환'이 시급하다.
뿐안 차이라따나 청장은 "당장 이 인터뷰를 하기 직전까지도 일본 정부 고위 관계자들과 핀테크, 스타트업 사업 관련 회의를 하다 왔다"며 "한국 금융사들이 장기적인 플랜을 갖고 접촉을 한다면 우리도 충분히 협력할 수 있다"고 말했다.
태국은 외국 자본 진출에 대한 규제로 해외 금융사의 법인과 지점 설립이 쉽지 않다. 현재는 금융 마스터플랜 3단계에 따라 오는 2020년까지 아세안 10개국을 제외한 외국 은행 신규 지점 설립 인허가를 중단한 상태다. 태국 현지 법인을 설립하려면 7000억원 상당 최저 자본금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는 점도 우리나라 금융사들에는 부담이 크다. 하지만 금융 마스터플랜 4단계가 도입될 2021년부터는 기회의 문이 열릴 수 있다.
장기적인 전략의 부재와 성급함은 그동안 여러 차례 우리나라 금융사들의 발목을 잡아 왔다. 2008년 KB국민은행의 카자흐스탄 센터크레디트은행(BCC) 투자 사례는 우리나라 금융 업계에 뼈아픈 교훈을 남긴 대표적 '흑역사'로 꼽힌다. 현지 시장에 대한 이해 부족, 섣부른 투자 등 한국식 해외 진출의 고질적인 문제가 종합적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당시 KB국민은행은 BCC 지분 41.9%를 8억5100만달러(약 9540억원)에 사들였지만 글로벌 금융위기의 여파로 9년 후 BCC의 장부상 가치를 1000원으로 손실 처리하고 전체 보유 지분을 매각했다. 약 1조원의 지분이 휴지 조각으로 처분된 것이다. '해외 진출'이라는 성과에 집착해 현지 금융 문화와 BCC의 취약한 구조를 면밀히 분석하지 못한 것이 화근이 됐다.
태국에서의 실패는 지금도 우리 금융사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당시 우리나라 은행들은 태국 정부의 만류에도 태국시장에서 전면 철수했다. 방콕에서 근무 중인 한 공기업 주재원 A씨는 "1997년 철수의 역효과로 인해 재진출을 노리는 우리나라 금융사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있다"고 설명했다. 일종의 '괘씸죄'에 걸린 것이다. 이로 인해 19년이 지난 지금 태국에 진출한 우리나라 금융사는 KDB산업은행, 삼성생명, KTB투자증권뿐이다. 유일한 은행인 산업은행도 법인이 아닌 사무소 형태다. 이는 우리나라 금융사들이 풀어야 할 숙제 중 하나다.
값 비싼 수업료를 내온 우리나라 금융사들이 해외 사업 접근법을 조금씩 바꾸고 있는 것은 긍정적인 신호라는 평가다. 최근 들어 국내 은행들은 해외 진출 시 현지화를 위해 현지인 임직원 채용을 강화하는 등 '로컬라이제이션'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기획취재팀 = 이승훈 차장(팀장) / 이승윤 기자(중국 상하이·선전, 홍콩) / 김강래 기자(싱가포르, 태국 방콕) / 정주원 기자(베트남 호찌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태국 방콕 전철(BTS) 시암역 앞.
열차를 타러 이동하는 길에 삼성전자, 할리스 등 익숙한 간판들이 눈에 들어왔다. 역사 안으로 들어서니 네이버 라인 홍보 부스 앞에서 태국 시민들이 상담을 받고 있었다. BTS를 타고 도착한 딸랏롯파이 라차다 야시장에서는 K팝 음악이 흘러나왔다. 야시장 중심지에는 '헬로 코리아(Hello Korea)'라는 간판을 내건 카페도 보였다. 그러나 유독 한국 금융회사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점포도 없었고 홍보하는 간판도 눈에 띄지 않았다.
동남아시아 2위 경제대국으로 꼽히는 태국은 우리나라 금융사들이 오랜 기간 진출을 꿈꿔왔던 기회의 시장이다. 하지만 현주소는 초라하다. 태국에 진출한 한국의 400개 기업 중 금융사는 3곳에 불과하다. 베트남 35곳, 인도네시아 20곳에 비해 매우 저조한 수치다. 태국 스마트폰 사용자 94%가 네이버 라인 가입자일 정도로 '메이드 인 코리아'의 힘이 커졌지만 여전히 태국 금융시장만큼은 '접근이 어려운 땅'으로 남아 있다.
우리나라 금융사들이 동남아 일대에서 '금융 한류'를 꽃피우고 있지만 이 같은 인식을 가진 사람을 종종 만날 수 있었다. 특히 우리나라 기업들에 대해서 '성급하다'거나 '근시안적'이라고 평가하는 인식이 적지 않다. 동남아에 금융 한류를 완전히 정착시키려면 이 같은 혹평을 호평으로 뒤집는 '인식의 전환'이 시급하다.
뿐안 차이라따나 청장은 "당장 이 인터뷰를 하기 직전까지도 일본 정부 고위 관계자들과 핀테크, 스타트업 사업 관련 회의를 하다 왔다"며 "한국 금융사들이 장기적인 플랜을 갖고 접촉을 한다면 우리도 충분히 협력할 수 있다"고 말했다.
태국은 외국 자본 진출에 대한 규제로 해외 금융사의 법인과 지점 설립이 쉽지 않다. 현재는 금융 마스터플랜 3단계에 따라 오는 2020년까지 아세안 10개국을 제외한 외국 은행 신규 지점 설립 인허가를 중단한 상태다. 태국 현지 법인을 설립하려면 7000억원 상당 최저 자본금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는 점도 우리나라 금융사들에는 부담이 크다. 하지만 금융 마스터플랜 4단계가 도입될 2021년부터는 기회의 문이 열릴 수 있다.
장기적인 전략의 부재와 성급함은 그동안 여러 차례 우리나라 금융사들의 발목을 잡아 왔다. 2008년 KB국민은행의 카자흐스탄 센터크레디트은행(BCC) 투자 사례는 우리나라 금융 업계에 뼈아픈 교훈을 남긴 대표적 '흑역사'로 꼽힌다. 현지 시장에 대한 이해 부족, 섣부른 투자 등 한국식 해외 진출의 고질적인 문제가 종합적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당시 KB국민은행은 BCC 지분 41.9%를 8억5100만달러(약 9540억원)에 사들였지만 글로벌 금융위기의 여파로 9년 후 BCC의 장부상 가치를 1000원으로 손실 처리하고 전체 보유 지분을 매각했다. 약 1조원의 지분이 휴지 조각으로 처분된 것이다. '해외 진출'이라는 성과에 집착해 현지 금융 문화와 BCC의 취약한 구조를 면밀히 분석하지 못한 것이 화근이 됐다.
태국에서의 실패는 지금도 우리 금융사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당시 우리나라 은행들은 태국 정부의 만류에도 태국시장에서 전면 철수했다. 방콕에서 근무 중인 한 공기업 주재원 A씨는 "1997년 철수의 역효과로 인해 재진출을 노리는 우리나라 금융사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있다"고 설명했다. 일종의 '괘씸죄'에 걸린 것이다. 이로 인해 19년이 지난 지금 태국에 진출한 우리나라 금융사는 KDB산업은행, 삼성생명, KTB투자증권뿐이다. 유일한 은행인 산업은행도 법인이 아닌 사무소 형태다. 이는 우리나라 금융사들이 풀어야 할 숙제 중 하나다.
값 비싼 수업료를 내온 우리나라 금융사들이 해외 사업 접근법을 조금씩 바꾸고 있는 것은 긍정적인 신호라는 평가다. 최근 들어 국내 은행들은 해외 진출 시 현지화를 위해 현지인 임직원 채용을 강화하는 등 '로컬라이제이션'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기획취재팀 = 이승훈 차장(팀장) / 이승윤 기자(중국 상하이·선전, 홍콩) / 김강래 기자(싱가포르, 태국 방콕) / 정주원 기자(베트남 호찌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