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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리극의 선봉자, ‘더 페이버릿’ 요르고스 란티모스 [M+김노을의 디렉토리]
입력 2019-02-22 12:33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 사진=ⓒAFPBBNews=News1
연출자의 작품·연출관은 창작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영화, 드라마, 예능 모두 마찬가지죠. 알아두면 이해와 선택에 도움이 되는 연출자의 작품 세계. 지금부터 ‘디렉토리가 힌트를 드릴게요. <편집자주>

[MBN스타 김노을 기자] 그리스 출신 영화감독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연출 세계에서 ‘부조리는 중요한 테마다. 감독이 그리는 인간 세계는 온통 부조리하고, 그 안에 놓인 인물들은 끊임없이 부조리의 상황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의 부조리극은 으레 갖춰야 할 설명을 제거한 상태에서 전개된다.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관객들은 이에 암묵적으로 동의한 채 극을 관람하게 되고, 지독하게 낯설면서도 묘한 기시감을 맛본다.

◇ 매력적인 부조리극의 시작 ‘송곳니(2009)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두 번째 장편 영화 ‘송곳니는 란티모스 표 매력적 부조리극의 태동을 알렸다.

영화는 외부와 격리되어 있는 교외 저택에 사는 한 가족의 이야기를 부조리극 형식으로 담았다. 아버지는 아내와 자식들의 모든 것을 통제하는 독재자다. 이로 인해 외부와 격리된 채 자라온 삼남매에게 바깥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끔찍한 곳이다. 하지만 견고한 줄로만 알았던 이들의 세계에도 균열이 발생한다. 아버지가 막내아들의 성욕을 해소시키기 위해 한 여자를 집으로 들이면서부터다.

영화 ‘송곳니 사진=‘송곳니 스틸컷

‘송곳니는 사회적 폭력과 억압적인 체제를 비판하는 부조리극이다. 나쁜 신처럼 모든 것을 통제하려 드는 아버지 때문에 자유를 박탈당한 자녀들은 케이지에 갇힌 동물과 다를 바 없다. 그들이 사방으로 막힌 벽을 부수려고 해도 도처에는 편견이라는 또 다른 폭력이 도사리고 있다. 그리고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이런 부조리를 극단으로 밀어붙이며 엔딩크레딧을 향해 내달린다.

이미 차고 넘치는 부조리극들 사이에서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영화가 유독 환대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수많은 이유 중 하나는 기존 그 어디에도 견줄 데 없는 독창성일 것이다. 그는 이미 익숙한 이야기를 독특하게 해석하고 냉소적으로 그려낸다. 극 중 서로를 파멸로 이끄는 인물들의 관계성을 그리는 거침없는 연출은 파격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냉소적인 유머도 빼놓을 수 없는 특징이다. 그는 의외의 포인트에서 기괴한 웃음을 만들어낸다. 영화의 비관적인 분위기 속에서 피어나는 황당함이 인물들의 고통을 배가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건 아이러니다.

영화 ‘더 랍스터 사진=㈜영화사 오원

◇ 기묘하고 불친절한 세계관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영화는 불친절하다. ‘송곳니를 예로 들면, 아버지가 가족을 가둬놓는 이유나 극에는 등장하지 않은 한 인물을 언급하면서도 그에 대한 부연 설명이 배제된다는 점 등이 그렇다. 감독은 영화 속 인물들이 겪어내는 현 상황에 대해서만 그려낼 뿐이다.

2015년 개봉한 영화 ‘더 랍스터도 마찬가지다.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이 영화의 세계관을 ‘45일 동안 호텔에 머무는 중 누군가와 커플이 되지 못하면 동물이 된다로 설정했다. 하지만 그 이유와 방식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고, 살기 위해 타인을 사냥하는 인물들의 기괴하고 처절한 심리를 비춘다. 그리고 타인의 목숨을 빼앗으며 자신의 인생을 연장하는 건 무의미함을 역설한다.

영화 ‘킬링 디어 포스터 사진=오드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전통의 파괴와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은 사회상에서 인간 정체성을 재정립해야 함을 계속해서 이야기 해왔다. 이러한 주제 의식은 2017년 제작된 영화 ‘킬링 디어에서 좀 더 극단적으로 나타난다.

외과의사인 남성은 아름다운 아내 그리고 딸, 아들과 평온하고 익숙한 삶을 산다. 하지만 자신이 수술을 집도했다가 사망한 환자의 아들이 찾아오며 모든 게 송두리째 뒤바뀐다. 이 소년은 당신이 내 아버지를 죽였으니 나도 당신의 가족 중 한명을 죽이겠다”며 당신의 가족들은, 첫 번째로 사지마비, 두 번째는 거식증 그리고 세 번째는 눈에서 피가 흐르며 몇 시간 뒤 사망한다. 당신이 죽을 한 사람을 선택하지 않으면 모두 죽을 것”이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 남성은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년의 말은 현실이 되고, 그는 결국 러시안룰렛 방식으로 가족들의 생과 사를 고른다.

영화 ‘킬링 디어 사진=오드

이 기가 막히는 초자연적 현상이 발생하는 와중에도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일절 첨언하지 않는다. 때문에 관객은 남성의 가족에게 일어나는 일을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다. 과연 저 소년은 신인가, 그렇지 않으면 괴물인가를 생각하면서 말이다. 또한 과학과 의학을 맹신하던 남성의 가치관이 완전히 전도되는 과정을 오롯이 느끼게 된다.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를 의외로 쉽게 배신하는 과정도.

‘킬링 디어에는 그리스 비극과 성서 등 종교적 요소가 가미됐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다만 이에 대한 특별한 배경 지식 없이도 영화를 즐길 수 있다는 건 요르고스 란티모스 작품만이 가진 특징이자 여타 영화들과 대조되는 지점이다.

영화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사진=이십세기폭스코리아

◇ 감독의 첫 사극,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21일 국내 개봉한 영화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는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첫 사극이다. 현대인들의 비뚤어진 욕망과 무기력함 탐구해온 그가 그려낸 과거는 어떤 모습일지, 개봉 전부터 많은 시네필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영화는 18세기 초 영국 궁정을 배경으로, 스튜어트 왕조의 마지막 군주인 여왕의 총애를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두 여자의 이야기를 담았다. 혼란의 시기였던 18세기 초 영국이 시대적 배경이지만 당대 사회상을 집중 조명하거나 구체적으로 설명하진 않는다. 단지 화려함의 결정체였던 왕실의 사각지대, 은밀한 곳을 비추며 각 인물들의 욕망을 거침없이 들춰낸다.

이해 불가능한 상황의 연속, 기득권의 가식과 변덕, 탐욕의 늪에 빠진 인간의 삶이 얼마나 부질없는지를 냉소적 시선으로 관찰해온 요르고스 란티모스. 그는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에서도 인간의 추악함과 어리석음, 나약함을 일렬종대로 세우고 방아쇠를 당겼다. 김노을 기자 sunset@mkcultur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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