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태국에서 민정 이양을 위한 총선이 치러진다. 군부 쿠데타가 일어난지 5년 만이다. 군부 정권은 총선을 다음달 24일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새해 들어 왕실이 현 국왕의 대관식을 5월 4~6일로 확정하면서 총선 연기설이 제기되고 있다. 시간을 벌기 위해 총선을 또 다시 미루려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되면서 태국 곳곳에서 군부 정권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동남아시아에서 인도네시아에 이어 두번째로 경제규모가 큰 태국 총선을 둘러싼 궁금증을 풀어봤다.
1. 총선은 언제 실시되나…3월 이후로 연기될 수도
태국 군부 정권은 지난해 12월 민정 이양을 위한 총선을 다음달 24일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 태국 선거관리위원회가 지난 4일 '2월 총선'을 공식화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지난 1일 태국 왕실이 마하 와찌랄롱콘(라마 10세) 현 국왕의 대관식을 5월 4~6일에 개최하겠다고 발표하면서 총선 일정이 꼬이기 시작했다. 태국 군부는 선관위에 총선일을 연기하는 방안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총선이 2월 24일에 실시되면 투표 결과는 두 달 뒤인 4월 25일에 발표되고 차기 총리를 선출하기 위한 첫 국회는 5월 9일까지 열려야하는데 대관식 행사들과 겹친다는 이유에서다. 태국에서 국왕은 절대적인 존재다. 60여년만에 거행되는 대관식은 어떤 측면에선 선거보다 더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현지 언론과 외신들은 "총선이 예정대로 치러질지 미지수"라며 "3월 이후로 연기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도하고 있다.
2. 어떤 정당들이 뛰고 있을까…친(親)군부 vs 탁신파(派)
현재 3개의 정당이 선거전을 펼치고 있다. 가장 선거 활동이 두드러지는 정당은 군부정권의 '친위대' 성격이 강한 팔랑쁘라차랏당(Palang Pracharat Party·PPRP)이다. 작년 창당된 신생 정당이지만 현 내각에서 활동하는 핵심부처 장관들 중에서도 산업부 장관과 총리실 장관 등 프라윳 찬오차 총리의 최측근 4명이 당대표 등 요직을 맡고 있다. 지지기반은 태국 남부지역 주민들과 방콕 중산층 및 부유층, 군부, 재계 등 이른바 기득권층이다.
친(親)군부 정당의 강력한 경쟁 상대는 탁신 계열의 푸어타이당(Pheu Thai Party)이다. 태국 북부지역과 북동부 농촌 지역주민들과 저소득층의 압도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 있다. 덕분에 푸어타이당은 1998년 이후 치러진 총선에서 단 한번도 패배한 적이 없을 정도다. 태국국립개발행정연구원(NID)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푸어타이당은 선두를 달리고 있다.
태국에서 가장 오래된 정당인 민주당도 존재감을 키우고 있다. 1946년 창당된 민주당은 아피시트 웨차치와 전 총리를 당대표로 선출해 선거 전열을 갖추고 있다. 아피시트 웨차치와 전 총리는 2008년12월~2011년 8월까지 민주당 주도의 연립정권에서 총리를 맡았다. 다만 반(反)군부이자 반(反)탁신이라는 정치적 입장을 취하고 있어 유권자의 지지를 얼마나 끌어모을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외신들은 어떤 정당도 단독으로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기 어렵기 때문에 연정이 불가피하다는 점에서 민주당이 캐스팅 보트를 쥐며 몸값을 높일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3. 총선은 어떻게 실시되나…하원만 직접 뽑고 상원은 군부 '입맛'대로
이번 총선에서 태국 국민들은 하원 의원을 뽑는다. 태국 하원은 총 500명의 의원으로 구성된다. 350명은 소선거구제가, 나머지 150명은 비례대표제가 각각 적용된다. 다만 국회의 또 다른 핵심인 상원(250명)은 군부 정권이 제정하고 국민투표로 확정된 새 헌법의 규정에 따라 최고 군정기구인인 국가평화질서회의가 뽑는다. 상원은 군부 정권의 입맛에 맞는 사람들로 채워지는 셈이다.
통상 내각의원제에선 하원 의석수를 가장 많이 차지한 정당에서 총리를 배출하지만 태국은 다르다. 상원과 하원 의원들이 모두 참여하는 합동의회에서 다수결로 총리를 선출한다. 여기에 태국은 총리 출마자격도 '비선출직 명망가'에게 줄 수 있도록 했다. 군인 출신의 군부 지도자인 쁘라윳 총리에게 총리가 될 수 있는 자격을 준 것이다.
이론적으로 프라윳 총리가 재선에 성공하려면 최소 376표를 확보해야 한다. 군부 정권을 지지하는 정당이 총선에서 최소 126 의석을 확보하면 상원을 합쳐 376의 '매직 넘버'를 달성할 수 있다.
4. 태국 총선은 왜 중요한가…민주주의 국가로 자리매김하는 시험대
태국 총선은 '민정이양을 위한 선거'라고 불리고 있다. 그러나 최소 5년간 의회의 반쪽인 상원이 군부 통제하에 놓인다는 점에서 이번 총선은 엄격하게 따지면 완벽한 민정이양을 실현하기 어렵다는 분석이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총선이 중요한 이유는 태국이 민주주의 국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시험대이자 첫 단추이기 때문이다.
태국은 아세안(ASEAN·동남아국가연합)에서 몇 안되는 민주주의 국가다. 과거 미국과 일본 등 서방 국가들이 태국을 높게 평가했던 이유다. 지리적으로도 동남아의 중심에 있고 다른 동남아 국가들보다 일찍 산업화의 길로 들어서면서 1990년대 연간 8~9%의 성장률을 기록했던 우등생 국가이기도 하다.
그러나 입헌군주제가 도입된 1932년 이후 무려 19차례의 군부 쿠데타가 있었다. 이런 정정불안이 국가 발전의 최대 걸림돌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현 군부 정권도 2014년 5월 탁신 친나왓 전 총리를 이어 취임한, 그의 여동생 잉락 친나왓 전 총리를 축출한 뒤 쿠데타를 선언해 집권했다. 닛케이아시안리뷰는 "태국이 이번 총선을 계기로 선거→사회 불안→쿠데타로 이어지는 악의 고리를 끊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고 보도했다.
5. 프라윳 총리가 느긋한 이유는…일찌감치 선거 활동하며 포퓰리즘 정책도 내놔
프라윳 총리는 현재 무소속이다. 외신들은 프라윳 총리가 정당에 일부러 가입하지 않았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정당에 발을 들이는 순간 다른 당들의 공격 대상이 되서다. 태국에서는 2014년 쿠데타 이후 5명 이상이 참가하는 집회와 정치 활동이 전면 금지됐는데 작년 말 이 조치가 풀렸다.
그러나 프라윳 총리는 이미 지난 가을부터 총리 자격으로 전국을 돌며 자신의 경제정책과 성과를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있다. 작년 10월엔 페이스북 등 SNS 활동도 시작했다. 탁신 친나왓 전 총리와 잉락 친나왓 전 총리가 농촌 빈민층에게 의료 혜택을 주고 소득보전을 위한 쌀 고가 수매를 실시해 마음을 샀던 것을 벤치마킹해 경기부양을 명분으로 새해 들어 저소득층에 일률적으로 500바트(약 1만원)을 지급하고 전기세와 수도세를 깎아줬다. 고령자들에게 통원비도 지원할 예정이다. 선거를 앞두고 군부 정권이 전형적인 포퓰리즘 정책인 돈 뿌리기에 나섰다는 분석이다.
외신들은 "다른 정당들의 손발을 묶어놓고 총리가 나홀로 선거 유세를 벌이고 있다"고 꼬집었다. 프라윳 총리는 자신의 친위대 정당의 추대를 받아 총리 재선을 노리고 있다는 관측이 많다.
하지만 프라윳 총리의 큰 그림대로 될지는 좀 더 두고 봐야한다. 지난해 말레이시아에서 건국 이래 최초로 정권이 교체된 것처럼 태국에서도 대이변이 일어나지 말란 법이 없다. 실제 태국 군부 정권은 말레이시아 선거 결과에 깜짝 놀랐고 총선을 연기하는 동기부여로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누가 차기 총리로 적합한가' 를 묻는 설문조사에서 프라윳 총리는 1위를 기록하고 있지만 지지율은 하락세다.
새해 들어 총선 연기설이 또 다시 제기되면서 태국 안팎으로 군부 정권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현지 언론들은 "군부 정권이 총선일을 미루면 항의 집회에 참여하는 시민들이 늘어날 것"이라고 전했다.
[임영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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