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에 맞서다 프랑스에 건너온 뒤에도 조국의 항일운동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던 독립운동가 홍재하(洪在廈·1898∼1960)의 구체적인 삶의 궤적이 사후 60년 만에 프랑스 동포들의 노력으로 확인됐습니다.
홍재하는 일제 치하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러시아와 북해를 거쳐 프랑스로 들어와 임시정부 인사들을 돕고 국내에 독립 자금을 댄 인물로, 지금까지도 그 공적의 전체 내용이 완전히 파악되지 않은 채 역사 속에 묻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지시간으로 오늘(30일) 연합뉴스에 의해 홍재하의 2남 3녀 중 차남 장자크 홍 푸안(76) 씨가 브르타뉴 지방 생브리외에 거주하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그는 2006년 누나로부터 부친이 임시정부 파리위원부 인사들과 교류한 서신 등 희귀문서들을 물려받아 보관해오다 최근 한인 부부의 도움으로 이 자료의 정리를 시작했습니다.
이 자료에 따르면, 홍재하는 1898년 서울 종로구 경운동에서 태어나 일제 치하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위험에 처하자 1913년 만주를 거쳐 러시아 무르만스크로 건너갔습니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프랑스로 건너와 프랑스 최초의 한인단체'재법한국민회' 결성에 참여했고, 2대 회장을 맡았습니다.
또 그는 1차대전 격전지 마른에서 전후복구를 하며 번 돈을 임시정부 파리위원부(대표 김규식)에 보탰고, 1920년에는 프랑스에서 3·1 운동 1주년 기념식도 열었습니다.
여기까지는 학계에 어느 정도 알려져있지만, 이들과 그 후손이 2차대전 종전 후 어떻게 살았는지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었습니다.
장자크 씨에 따르면, 홍재하는 1920년대 파리의 미국인 사업가의 집사를 거쳐 프랑스인 여성을 만나 가정을 꾸렸고, 번 돈을 계속 독립운동 자금으로 보냈습니다.
해방 후 처음 설치된 주불 대한민국 공사관 문서의 체류목적을 적는 난에 그는 "국속을 복슈허고. 지구상 인류에 평등허기를 위허여"라고 적었습니다.
'국속'을 '國束'으로 읽는다면, '나라를 일제에 빼앗긴 것에 복수하고 인류 평등에 공헌하고자 프랑스로 건너왔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프랑스와 한국이 해방된 뒤에도 귀국하지 못했고, 고국이 다시 전쟁에 휩싸이자 비탄에 빠져 말을 거의 잃었다고 전해졌습니다.
이후 휴전 뒤 귀국하지 못한 채 1960년 암으로 타계했습니다.
한편, 홍재하는 사후 60년을 앞둔 지금까지도 정부로부터 독립운동과 관련한 어떤 인정도 받지 못했습니다.
[MBN 온라인뉴스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