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안시성` `협상` 동시 출연 배우 정인겸, "나를 키운 건 팔할이 고독이었다"
입력 2018-10-03 15:01  | 수정 2018-10-30 15:35
사진=한주형 기자
[나는 조연배우다-23] 배우 정인겸(50)을 만난 것은 그가 '귀수'(2019·감독 리건) 촬영을 끝마친 다음 날이었다. 범죄 액션물 '귀수'는 바둑으로 제 삶의 모든 것을 상실한 귀수(권상우)가 목숨 걸고 복수에 나선다는 이야기. 극중 황사범이라는 조연 캐릭터로 분한 정인겸는 전날 찍은 클로즈업 신이 꽤나 흡족스러웠던 듯했다. "담배 한 대 태우고 하자"며 어깨동무 하더니 이처럼 말하는 것이다.
"연극 배우랑 다르게 영화 배우는 클로즈업을 견디느냐 못 견디느냐로 판가름이 나는 것 같아요. 연극 무대에서는 '퍼즈'(멈춤)가 배우의 권력이죠. 대사를 치다가 '이렇게 살... 고 있어'하며 4~5초간 멈추는 순간, 관객들은 꼼짝을 못 해요. 근데 말입니다. 그것보다 강한 게 스크린에서의 클로즈업이예요. '떼 신'(단체 신) 30초보다 클로즈업 3초가 더 강해. 그걸 알기에 배우들이 잘 하겠다고 욕심을 부리곤 하는데, 그럼 '삑사리'가 나. 나는 반대로 힘을 좀 빼고 했어요. 황사범 캐릭터 뿐 아니라 나 정인겸이라는 사람이 원채 기운이 세서 말예요. 다행히 원큐에 끝냈어요. 촬영 감독이 면전에서 엄지로 '따봉' 하며 '너무 좋습니다, 최고'라고 하대요. 그 순간 희열이 기가막혔어요. 이루 말할 수 없는 쾌락이 느껴졌달까. 행복했습니다."
강렬한 눈매와 해명하기 힘든 아우라. 그는 무시무시한 기운을 머금은 사내였다. 167cm 물리적 체구는 문제될 게 아니었다. 스스로는 "나이 쉰이 되니 많이 약해진 것"이라며 둘러대지만, 그는 거의 귀기(鬼氣)가 느껴질 만큼 상대를 압도했다. 타자를 마주할 때 생기기 마련인 모종의 경계 같은 건 쉽사리 허물어졌다. 먼저 허물고 들어온 것은 정인겸이었고, 그 앞에 마주 앉은 '나'는 거의 무방비로 이 강렬한 존재감을 감당해야 했다.
사진=한주형 기자
정인겸은 1968년 서울 옥수동 태생이다. 현재 성북동 옥탑방(그의 별칭은 '옥탑방 보헤미안'이라 한다)에서 혼자 사는 그는 "세상의 바닥을 실체적으로 경험한지라 무서운 게 거의 없다"고 스스럼 없이 말한다. 이것은 해석을 요하지 않는 표현이다. 혹독한 가난이 일상이었기에 '노가다'(막일)란 노가다는 안 해본 것이 없었다. 삼일 밤낮을 굶어본 게 다반사였고, 잡역부도 꺼려하는 하수구, 그 악취나는 오물 더미로도 마다하지 않고 들어갔다. 그의 나이 마흔 무렵의 일이다.
10대엔 구타가 일상이었다. 시대는 엄혹한 전두환 군부 정권기였고, 교권은 폭력의 다른 말이었다. 날 때부터 인상이 매서웠던 그는 교사들로부터 찍혀 잇단 체벌과 구타에 시달리곤 했다. 유소년기부터 이십대 초중반 무렵까지 그가 심한 말더듬이었던 건 이와 무관하지 않다. 세상의 폭력은 소년의 입을 저 스스로 다물게 했고, 그는 점점 더 내면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그것이 세상에 저항하는 그만의 싸움 방식이었다.
배우 정인겸은 영화 `협상`(2018)에서 인질범 민태구(현빈)에게 납치된 국정원 요원(화면상으로 왼쪽)을 연기했다. /사진제공=CJ ENM

나이 마흔 일곱에 출연한 최동훈 감독의 '암살'(2015)은 처음으로 그를 대중에게 알리게 한 작품이다. 생애 처음 조연 역에 발탁돼 대작 출연 기회를 잡았고, 이때 선보인 일본 경찰 사사키는 정인겸 특유의 강렬한 인상과 아우라로 대중의 뇌리 깊숙이 각인된다. 그리고 3년이 지난 지금, 그는 여느 때보다 왕성히 영화 출연 작업에 매진 중이다.
올 가을엔 두 편의 대작에 조연 출연했다. 200억원대 대작 '안시성'(당 태종 이세민의 책사 역)과 100억원대 대작 '협상'(주인공 민태구의 인질 역)에서다. 드라마에서의 활약도 점점 더 두드러지고 있으니, 화제작 '미스터 선샤인'에서 하야시 공사로 캐스팅된 것이다. 야마다(최강제)를 일본도로 벤 직후 "진실보다 쓸모 있는 미친 자가 필요하다"며 츠다(이정현)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는 그는 '암살'의 사사키 이상으로 냉혹한 기운을 자아낸다.
과연, 풍파 많은 삶으로 점철된 정인겸 생애의 구체(具體)는 과연 어떤 질감과 무늬들로 새겨져 있을까. 우선은 올 가을 흥행작인 '안시성' 얘기로 출발해야겠다.
영화 `안시성`(2018) 촬영 현장. 당태종 이세민을 연기한 박성웅 배우 옆(왼쪽)에 그의 책사를 연기한 정인겸이 있다. /사진제공=NEW

-이번 '안시성'은 배우님께 또한번의 각별한 영화일 것 같습니다. 안시성을 함락하러 온 당태종 이세민 군에서 이세민(박성웅)의 책사로 조연 출연하셨죠.
▷요 며칠전 압구정동에서 술자리를 가졌어요. 이런 말이 튀어나오더라고요. "(박)성웅씨 우리가 영화 찍을 때 뭘 봤는지 드디어 이해했어"라고.
-무얼 이해했다는 말씀이신지?
▷파란 벽만 놓고 했으니까요. 고구려군 촬영 때 우린 고구려군을 한 번도 못 봤어요. 파란 벽을 놓고 찍었지. 그 벽을 앞에 놓고 내가 "성이 무너집니다"이러니 둘이 웃고 그랬어요. 그간 우리가 촬영장에서 무얼 보고 연기한 건지 영화를 보고나서야 확인할 수 있었다는 거예요.
-촬영은 주로 어디서 하셨습니까.

▷지난 겨울 강원도 고성에서였어요. 거기 인근서 군 복무를 했었죠. 근데 말예요. 고성이 바람이 정말 세차게 불어요. 해발 1700m에서 바닷가로 내려오는 높새바람이 장난이 아닌 겁니다. 화면에 바람은 하나도 안 보이는데 실제론 천막이 막 찢어지고 그랬어요. 날은 추우니 입김이 막 나오는데 그걸 지우느라 비용이 꽤 들었다고 해요. 그리고 말입니다. 이 영화 엑스트라가 200~300명이예요. 하루에 1억원씩 들어가는 대작인데, 말 타고 있으면 꾸르륵 하고 신호가 와요, 장 쪽에. 그렇다고 겨울에 해도 짧은데 화장실을 다녀오면 촬영이 중단되니 300~500만원가량 날리는 겁니다. 그래서 상당수 아침에 지사제 먹고 찍었어요. 저 멀리 변이 산처럼 쌓여있었지.
-출연 제안은 어떤 경로로 받으셨고요?
▷재작년에 찍은 '살인자의 기억법'(2017) 때 함께한 구태진 피디가 연결해줬습니다. 당나라 언어를 한 세 달 정도 모여 훈련했어요. 일본어보다 쉽지 않더군요. (어조가) 출렁출렁하니까. 촬영하면서 후배들에게 미안한 게 있었어요. 저는 (박)성웅씨 옆에 붙어있으니 20회차 찍은 것 중 한 신을 빼고 잘린 게 없어요. 근데 영화에 당나라 장군 다섯명이 나오지요? 이 분들은 편집 과정에서 많이 잘렸어요. 초반에 장수들이 양만춘(조인성)이 어떻습니다, 연개소문(유오성)이 어떻습니다, 라고 하는 신이 있죠. 사실 제 대사였습니다. 혼자만 하기 미안해서 제작 전에 후배들에게 나눠주는 걸 건의드렸던 거예요. 김광식 감독님이 "아, 그러십시오"라고 승낙하셨고요. 그 신이라도 없었으면 이 후배들 얼굴도 안 나왔을 겁니다.
"본인 연기에 대해 자평해달라"고 하니,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기능적인 역할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안시성의 주인공은 '무술팀'"이라며 무명 배우들을 추어 올렸다. "나 같은 배우는 분위기만 잡았을 뿐입니다. 실상 그 사람들이 다 했어요. 돈도 많이 못 받는데 말 타고 싸움하고 낙마하고, 날아다니면서. 고생 참 많이 하셨지요."
-무술팀이라고 하시면.
▷멤버가 있어요. 무명 배우 중 승마 잘 하는 분들로 섭외된 겁니다. 30여명 돼요. 얼굴 한 번 제대로 안 나오지만 어떤 신에선 당나라군 복장을 하고, 어떤 신에선 고구려군 복장을 하고, 어떤 신에선 기마병 옷을 입고 그 고생을 다 하신 거죠. 이분들과 술을 좀 먹었는데 일당이 얼마 안 됩디다. 게다가 9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찍은 건데, 9~10월에 말들이 말을 여간 안 들었어요. 전국 마방(馬房)에서 기운 센 놈들만 모아 놓았는데, 이 녀석들이 서열싸움을 했던 겁니다. 서로 뒷발질 해가면서. 저도 (박)성웅씨도 말을 좀 탈 줄 아는데, 여러번 떨어졌어요. 전 왼팔 인대를 다쳐서 세 달간 힘 좀 들었고.
-일종의 '기마 리스크'군요.
▷'로쉬'라는 말이 있었어요. 암놈인데 와, 성질이 대단히 안 좋았어요. 계속 옆에 말과 싸우고 말이죠. 무술팀도 제일 꺼려하던 말이었습니다. 저도 동료 배우들과 만나면 그 녀석 욕부터 하고 그랬죠. 배우들이 승마를 경북 문경새재에서 배웠어요. 아침 6시에 말 다루는 기사님 뵈러 가면 제일 먼저 물어본 게 "'로쉬' 어디있습니까, '로쉬'만 안 타면 되는데"였죠.
사진=한주형 기자
-이번에 '협상'에서도 조연 출연하셨어요. 인질범 민태구(현빈)에게 극 초반 태국에서 납치되는 남자죠. '안시성'과 촬영 기간이 겹치진 않았을까 싶은데요.
▷태국에서 납치되는 신을 찍은 게 지난해 겨울이었어요. 강원도에서 영하 15도 날씨에 찍다가 밤 비행기 타고 태국 가서 이틀 간 찍고 돌아왔어요. 태국이 영상 40도 정도 되는 날씨였어요. 온도차가 무려 50도예요. 사우나에 갖다 온 느낌이었지요. 8월에 스튜디오 촬영을 하고 12월에 추가 촬영을 태국에서 했어요. 기억하기론 보름 가량 태국에 있었죠. 12월 초 서울 기온이 영하 10도 아래로 열흘 간 계속됐는데, 제가 사는 성북동 옥탑방에서 수도가 다 터져있더군요. 수리비만 70만원을 들였답니다.
그는 6년 째 서울 성북동 옥탑방에서 홀로 산다. 결혼은 여지껏 하지 않았다. 6개월 마다 주인 할머니께 월세를 선불로 준다고 했다. "들어올 땐 25만원이었는데 지금은 40만원씩 현금으로 드려요. 올려달라는 말씀 한 번 없으셨던 분이지만, 그래도 그게 맞는 것 같아서." 현재 그가 사는 옥탑방은 동서남북으로 북한산과 북안산 등이 훤히 보이는 곳에 자리해 있다. 그는 이 거처에 꽤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성북동 3대 옥상입니다. 절경이죠. 360도로 전부 산이 있어요."
-소문대로 '옥탑방 보헤미안'이시군요.
▷처음엔 시설이 엉망이었어요. 평수는 14평이니 혼자 지내기 딱이지만요. 제가 일일이 다 수리하고 여태껏 살고 있는데, 성북동을 두고 이런 얘기가 있어요. "기 센 놈은 성공하는데, 기 엉성한 사람은 탈탈 털려서 나온다." 주인 할머니 말씀으로도 "6개월 이상은 못 버티고 다 나갔다"고 하십디다. 근데 전 6년 째 지내고 있는 거죠.
-새벽녘에 일어나 바깥 경치를 감상하는 모습이 그려지는데요.
▷맞아요, 아침 5시면 일어나야 해요. 내 의지라기 보단 벵갈 고양이 한 마리를 키우거든요. 그 시간이면 밥을 줘야하죠. 그런 다음 밖에서 담배 태우며 아침을 시작하는 겁니다.
-고독과 외로움이 불가피할 것 같습니다.
▷이 얘기를 하고 싶네요. 한창 젊었을 때입니다. 지금보다 훨씬 호르몬에 휘둘릴 시기였죠. 31~33세때입니다. 극단 '연우무대'에서 연극인으로 얼굴 조금 알리고, 돈 벌려고 '예술의전당'(이하 예당)에서 연극하던 때였어요. 예당 한가람미술관 우측에 자료실이 있죠. 거기 2층에 미니도서관이있는데, 예술자료원이라는 곳입니다. 거기가 끝장나게 좋아요. 아마도 회화와 사진 쪽에서는 가장 방대한 자료를 보유 중일 겁니다. 한창 굶주리고 살던 그 시기, 틈만 나면 거길 갔어요. 아침 일찍 가서 빵 먹으며 화집 보는 데 빠져 지냈지요. 서양 문화에 대해 여기서 다 공부한 거 같아요. 왜 이렇게 그렸을까, 이 사람은 어디서 어떤 영향을 받은 걸까 하며 수년 간 거진 다 읽었어요.
-도서관에서 화집을 보는 고독한 예술가라.
▷거기만 간 건 아닙니다. 예당이 지겨워지면 가장 가까운데를 갔죠. 정독 도서관요. 거기도 책이 좀 많습니까. 난 여기서 누구보다 풍요로운 생활을 누렸어요. 어찌보면 지금 생각해도 무척 행복했던 기간입니다.
이 대목에 이르러 조금 의아해졌다. 그의 나이 30대 초반이면 때는 1990년대 후반. 1997년 IMF 직후이므로 대한민국이 거의 풍비박산이 난 시기 아닌가. 기업들이 줄도산하고 실직자가 끊이지 않던 이 엄혹한 시기에 풍요로웠다라. 더욱이 돈과는 거리가 먼 가난한 연극인이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하루에 5000원이면 충분했다"며 웃음 지었다.
-5000원이요?
▷예, 5000원. 이거면 충분했습니다. 돈 없을 때 정독도서관에서 하루를 나면 5000원으로 충분했어요. 당시 담배 2000원, 라면 한 그릇 먹으면 1000원, 왔다갔다 차비 2000원, 그럼 딱 5000원인 겁니다. 연극인이니 고정된 일터가 있는 것도 아니고 남는 건 시간이지 않았겠습니까. 제 30대는 하루 5000원이면 충분했습니다.
-작품이 없을 때면 매일 같이 도서관을 간 건가요.
▷그렇죠. 저는 배우가 가난하다고 빌빌 떨지 말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남들보다 시간이 많잖아요. 그런 숱한 시간들을 저는 이런 식으로 보냈어요. 이제는 작품이 늘어서 자주 못 가지만 말입니다. 지금 생각해도 제겐 정독도서관에서의 일상이 행복했습니다. 당시 기억이 지금도 새록새록합니다.
-이를 테면.
▷1997년 IMF 직후이니 실직자들이 좀 많았겠습니까. 1998~2000년엔 멀쩡하게 넥타이 메고 오는 분들이 다수였어요. 출근한다고 마누라한테 뻥 치고 전부 이리로 오는 거지. 넥타이맨들 상당수가 이른 아침부터 공인중개사,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더군요. 도서관 건물이 세 개죠. 두 번째 맨 우측에 담배피는 공간이 유일하게 있어요. 거기에 있으면 "2번 문제 어땠어?" "정답 뭐지" 하며 떠드는 40대 공시생들, 공인중개사 준비생들을 매일 같이 봤어요. 그러다 오후가 되면 땡땡이 친 중고교생들 미팅 장소가 되고요. 거기가 경기고 옛날 자리잖습니까. 중고교생들 담배피며 노는 모습이 지금도 아른거립니다. 그리고 말예요. 여기에 오시는 노인분들은 전부 깊게 학문하는 할아버지들입니다. 종로3가에 모이는 노인들이랑은 급이 다르달까요. 하루종일 책을 보시며 말년을 수양하시는 겁니다.
-정독도서관이 하나의 작은 사회였군요.
▷재밌는 건 말이죠. 그 누구도 서로한테 터치를 안 한다는 겁니다. 나같이 못 나가는 배우도 있고, 모두가 평등한 공간인 거지. '예당'에선 업종이 비슷해요. 사진작가, 발레리노, 연극배우, 영화배우 위주니 서로 누구지 누구지 하며 눈치 보는 게 있어요.정독도서관은 그 점에선 상당히 자유로웠던 거죠. 서로가 서로한테 이질적이니까.
연극일이 없을 땐 주에 한 번 노가다를 뛰었다고 했다. 그걸로 10~20만원 벌면 도서관을 오가며 버티는 식이다. 부양가족이 없으니 내 한 몸 챙기면 그만이었으나, 외로움 만큼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언젠가부터 혼잣말이 늘더라"고 했다. "매일 라면만 먹을 순 없으니 가끔 꽁치캔 하나 사고, 소주 한 두병에, 담배 한 갑을 사 옥탑방에 갔어요. 그걸로 김치찌개 끓여서 먹고 지내는 거죠. 다 좋은데 텔레비전에다 말을 걸게 돼요. '저 새끼들 왜 저래, 알았어 간다잖아!' 약간 병적으로 보일 텐데, 혼자 오래 살면 그리 되더라고요." 그러다 건강이 악화돼 난생 처음 친구에게 도움을 구했다고 한다.
사진=한주형 기자
-어떤 친구들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내가 중대 철학과를 나왔어요. 거기 아마추어 연극반 출신입니다. 고선웅 연출이 내 동기인데 지금도 가끔 보는 친구죠. 조광화 연출은 선배고. 그리고 지금은 약국하고 있는 박종대라는 친구가 있어요. 내 나이 마흔 다섯에 생전 처음 이 종대라는 친구한테 SOS를 쳤어요. 사나흘을 거의 굶다시피하며 지냈던 시기입니다. 전화를 걸었죠. "오랫만이다, 종대야... 한 50만원만 보태줄 수 없냐." 걔가 그러더군요. "계좌번호 불러줘 이놈아. 내가 많이는 못 도와줘도 정말 필요할 땐 언제든지 얘기 좀 해줘. 나 그 정도는 번다. 네 힘들게 사는 거 내 마음에 영 안 좋다."그 후로 2년 간 노가다를 안 했는데, 이 모두 그 친구 덕입니다.
-대학 얘기 하신 김에 시간을 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보죠. 지금의 배우님에 이르시기까지를 짚어보려면 저 멀리 유년 시절 모습부터 복기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1968년 옥수동 출신 서울 토박이시죠.
▷(그가 "잠시 기다리라"며 휴대폰으로 찍은 사진을 찾아 보여줬다. 흑백으로 된 일가족 단체사진이었다. 딱 봐도 한 가운데 예리한 눈매를 지닌 작은 소년이 눈에 띄였다. 정인겸 본인이었다.) 옥수동 300번지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땐 집이 좀 살았나봐요. 아버지가 핸드백 공장을 했어요. 3층 집에서 살았는데, 그때 뿐이었지. 1975년도 석유파동이 일어나고 집안이 망한 겁니다. 10만원짜리 전세 집을 전전했고 서울 이곳저곳으로 5번을 전학을 갔어요. 그러다보니 국민학교 때부터 수학 과목은 포기해야 했어요. 학원을 다닐 형편은 안 되었지. 자의가 아닌 상황에 의해 그리 된 겁니다. 전 지금도 산수를 못 해요.
-집안은 엄한 편이셨습니까.
▷아버지가 속된 말로 한량이랄까요. 사업을 하셨지만 꿈이 너무 크셔서 늘 실패하셨습니다. 한 템포 반 템포 정도 빨라야 성공할 텐데, 우리 아버지는 두 템포가 빨랐죠. 앞서가시다 망하신 케이스가 아닐까 합니다. 그러다보니 실질적인 생계는 어머니가 해결하셨어요. 고생 참 많으셨지.
-배우님은 양친 중 어느 분을 더 닮으셨는지요.
▷반반. 난 아버지랑 관계가 썩 안 좋았어요. 요즘 말로 맨스플레인(대체로 남자가 여자에게 의기양양하게 설명하는 것)이라 하죠. 아버지가 꼭 그러셨어요. 이따금 그런 아버지 성향이 제 안에서 나오면 아, 내가 어쩔 도리 없이 아버지 피를 이어받은 놈이구나 싶을 때가 있어요. 손님들한테 옷이든 가방이든 좋아하면 퍼주는 실속 없는 면도 닮은 것 같고요. 좋게 말하면 아버진 호방하신 사람이고 나쁘게 말하면 실속 없는 사람인 거지. 그러면서도 난 혼자 있을 때 편안해지고 혼자 오래 살다보니 요리를 잘 하는데, 그럴 땐 천상 엄마 닮은 아들이구나 싶기도 해요. 요리를 정말 잘해요, 제가. 김치도 손수 담가 먹고요. 요샌 조금 바빠진 터라 시장서 사먹으려고 하지만요. 이제 여든세 다 되신 어머니는 매사 침착하시고 무진장 소심하시고 타인에 대한 배려심이 대단한 분인데, 그런 건 또 어머니 닮았어요. 얼굴 틀은 아버지를 닮았는데, 오밀조밀한 거랑 작은 체구는 어머니를 닮았죠.
국민학교 시절, 그는 손바닥 껍질이 자주 벗겨졌다고 한다. 영양실조 때문이었다. 지금도 그의 노모가 안쓰러워하는 것이 하나 있다면, 한창 자랄 그 시절 제대로 끼니 한 번 챙겨주지 못한 것이다. "지금도 체구가 작은 게 마음에 걸리시나봐요. 내가 형만 둘인데, 우리 어머니는 늘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죠. '우리 막내 우유라도 잘 먹였어야 하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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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어떻게 대답하셨나요.
▷엄마, 괜찮아. 내가 키가 더 컸으면, 173~4cm만 됐어도 경쟁력 없어. 사람들은 생긴대로 먹고 사는 거야.
그의 유년 시절을 괴롭힌 건 가난만이 아니다. 때는 전두환 군부정권 시대. 온 세상 폭력이 만연하던 구타의 시대였다. 눈빛이 강렬한 데다 인상이 썩 좋지 않던 그는 교사들의 체벌 1순위였다. 별 다른 잘못이 없어도 불려나는 게 다반사였다. 불려나가면 뺨을 맞거나 매질이 이어졌다. 주먹질도 일상이었다. 그는 "학우들에게 맞아본 적은 없다"면서 "때리는 쪽은 늘상 교사들이었다"고 회고했다. "제가 한쪽 눈이 안 좋아요. 거기에 작지만 센 눈을 가졌다보니 쳐다만 봐도 반항하는 줄 알고 체벌하는 겁니다. 한 번은 경주에 수학여행가서 선생 6명에게 구타당한 적이 있을 정도입니다."(그는 교정 불가 약시다. 군면제 사유가 되는 약시임에도 그대로 군입대를 했다고 한다.)
-그 모든 폭력과 부당함을 어떻게 감내하신 겁니까. 굉장한 트라우마가 되었을 수 있는데.
▷자퇴했어야 맞지, 검정고시 보고요. 그런데 집안이 망한지라 어머니한텐 그 얘기를 차마 못 하겠더라고요. 정말로 저의 10대는 '구타의 역사'였어요. 전학을 자주 다녔다고 했죠. 학기 초마다 일부러 눈을 착하게 뜨려고 해봤어요. 근데 또 착하게 뜨면 "왜 그러냐, 새꺄" 하며 또 구타하는 겁니다. 아무튼 앞서 말한 경주 구타 사건 이후 2년 여간 그분들한테 인사를 안 했어요. 유령 취급했지. 아무도 뭐라 안하더군요. 후에 잘못이 없음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요.
-조심스런 질문이지만 어린 시절부터 심한 말더듬이셨다고 들었어요. 여하한 상처들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은데요.
▷국민학교 1학년 때였습니다. 창가 쪽에 앉아 수업을 듣던 중 바깥을 보고 있었어요. 바깥 풍경이 참 예뻤거든요. 그때 여선생이 칠판 지우개를 제 쪽으로 던집디다. 40대 정도 되는 분이셨는데, 나오래요. 나갔더니 껌을 뱉으란 겁니다. 저는 껌을 씹고 있지 않았어요. 그런데도 뱉으라며 뺨을 때리셨던 거죠. 그러더니 갑자기 제 입안으로 손을 집어넣으면서 없는 껌을 꺼내시려는 겁니다. 그 순간 오바이트를 했어요. 그 토사물이 묻은 손으로 선생은 또다시 제 뺨을 때리셨지요. 저는 전혀 껌을 씹지 않았는데, 저는 전혀 잘못이 없는데 그날 어머니가 교무실에서 고개 숙여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하며 머리를 조아리시는 모습을 봐야 했어요. 이해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분노가 끌어올랐습니다. 그날 이후 말을 하지 않기로 작정했어요. 자발적으로 말을 하지 않고부터 정말로 말이 나오지 않게 되더군요.
-내면의 창문을 그때 스스로 닫아버리신 거군요. 모든 일상에서 말을 안 하셨던 겁니까?
▷아니요, 우리 가족들, 믿고 신뢰하는 친한 친구랑 조용히 있을 땐 어렵게나마 대화가 돼요. 하지만 바깥에만 나가면 말을 더듬게 되는 거죠. 초성이 안 나와요, '더, 더, 더'하며(숨이 막혀하며 말 더듬는 광경을 그는 직접 재연해 보였다). 선생이 무얼 시키거나 공공적인 장소에 있을 땐 늘 그랬습니다.
-지금 이렇게 유창하게 말씀을 잘 하시는데, 영화계에서도 화술의 달인으로 불리는 배우님이신데, 이런 아픈 과거사가 있을 줄은 전혀 짐작도 못했습니다. 극복은 어떻게 하신 겁니까.
▷20대 중반 무렵이었지. 코뿔소 덕분이었어요.
-코뿔소요?
▷네, 코뿔소 덕분에 해방됐습니다.
농담이 아니다. 강원도 고성에서 군복무를 마치고 제대한 직후 그는 서울대공원 동물원에서 3개월가량 아르바이트 일을 얻는다. 아프리카관 코뿔소 담당이었다. 매일같이 코뿔소 배변을 치우고 물을 갈아주는 관리직군. 당시 그가 관리한 코뿔소는 흰 꼬뿔소로, 희귀종이었다. 그는 "낮선 공간에 적응 못 하고 기운 없어 하던 녀석이 3월말 즈음 난동을 부린 적이 있다"고 했다. "퇴근 준비하다 선배가 고레 고레 소리를 지르며 저를 찾더군요. 녀석이 광분해 장갑차처럼 뛰고 있다고요."
-그게 어떤 영향을 주었다는 거죠?
▷들어보세요. 새 세상에 적응 못하고 서너 걸음 하루에 걸을까 말까 하던 녀석이 온 공간을 휘저으며 미쳐 날뛰더라 이겁니다. 제가 그 광경을 보는데 처음 느껴보는 에너지에 휩쌓였어요. 공중으로 솟아오를 것처럼 온 몸이 가벼워졌어요. 그렇게 조용히 하늘로 올라가는 것 같았죠. 다 우스워보이고, 그간의 내 상처들, 고민들도 우스워보이고, 지난 25년 세월이 우스워보이고. 그러다 십분 넘게 웃음이 나오는 거예요. 내 안에 자리해 있던 어떤 거대한 벽 같은 게 그 순간 허물어졌어요. 해방의 순간이었죠. 말더듬도 그 순간 그쳤어요. 내적 변화가 생기니 호흡이 통제가 되기 시작했고, 서두르지 않게 됐지요. 내가 원할 때 내가 원하는 호흡을 할 수 있게 됐고요.
-영화로 치면 뭐랄까, 참 시네마틱한 순간인데요. 나이는 스물 다섯, 팔팔한 청년기에 광분하는 코뿔소에서 자기 자신을 보고 그간 자신을 옭아매던 거대한 사슬을 끊고 나오는 순간. 그 공간이 동물원이었다는 것도 참 흥미롭고요.
▷이런 기억도 선명합니다. 개장 초기라서 동물원이 엉망일 때였어요. 1992년도였는데 서울대공원 뒤편 산책로가 참 좋았어요. 그 시절 연애할 때면 몇 번 여자친구를 데리고 갔었어요. 돈 한푼 없는 가난뱅이도 그땐 연애를 할 수 있었지요. 상대가 참 훌륭한 사람들이었어요. 내 가난을 다 이해해주는 여자들이었으니. 혹시 가랑비 내릴 때 동물원 가봤어요? 동물원은 가랑비 내릴 때 평일에 가면 좋습니다.
사진=한주형 기자
-가랑비 내리는 평일이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나요?
▷평일은 인적이 뜸한 데다 가랑비가 내리면 동물들이 무척 좋아하거든요. 실내에 머물지 않고 그 보슬보슬 내리는 비를 즐기려고 전부 나와요.
정인겸을 마주할 땐 준비해온 질문지가 실상 불필요했다. 인터뷰를 주도한 건 대체로 그였고, 인터뷰어는 그런 그의 입가로 발화하는 말들의 풍경을 그 자체로 음미하면 그만이었다. 그 풍경의 면면을 세세히 들여다보다 이따금 들곤 하는 물음들을 그때 그때 던지면 되는 것이었다. 그는 청자를 사로잡게 하는 불가해한 매력이 존재의 심연 아래 잠복해 있는 듯했다. 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거대한 인력. 첫 대면에 느낀 위압감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중앙대 진학 당시 철학과를 택한 이유가 있습니까.
▷아까 수학을 못 했다고 했죠. (학력고사) 8점이었어요. (답안지) 'ㄱㄴㄷㄹㅁ' 중 'ㄴ'만 찍었는데 그리 된 거였죠. 재수하려 했는데 군 휴가 나온 둘째형이 그러더라군요. "우리가 재수할 형편이냐 이놈아, 네 성격상 재수는 가당치도 않다." 담배 빡빡 피던 반항아처럼 보이던 저였으니 형은 걱정스러웠던 겁니다. 아무 곳에나 지원하라길래 살펴보니 한양대, 중앙대 철학과 정도는 갈 수 있는 성적이었어요. 한양대는 집에 가까운 데다 남자들이 많으니, 처음 가보는 흑석동 중앙대 꽃밭을 가자. 그리로 출근을 하자고 한 거죠.
-어릴 때부터 생각이 깊은 조숙한 학생이 아니셨을까 해요. 말더듬이에 세상과 얼마간 단절된 청소년기를 보내셨지만, 그 기간 내적으로 담금질하며 버티진 않으셨을까 싶고요. 듣기로, 고교 시절 백일장에서 줄곧 상을 받으셨다고요? 연극에의 관심은 언제부터 싹튼 건가요?
▷아버지가 허세가 좀 있어서 국민학교 5학년 때 민음사 한국문학 100선을 사주셨어요. 집에서 혼자 있으면 읽을 게 그것 뿐이었죠. 그걸 반복해서 계속 봤어요. '꺼삐딴 리'부터 우리 문학은 그때 다 읽은 것 같아요. 그러다보니 국어, 사회과목은 당연히 잘 했지요. 재밌었어요. 집에 티비도 없으니 다른데 관심 쏠릴 것도 없었고, 새롭게 단어 익히는 맛도 일찍이 느꼈고.그러다 세상 돌아가는 모양이 막연히 궁금해 철학과에 들어갔는데, 공부는 안 하고 그때부터 연극을 한 거예요.
-연극반 입문 계기라면요?
▷1학년 때였나. 1987년 6월 학쟁이 끝나고 운동권 형들이랑 연극반 극장에 놀러갔어요. 거기서 생면부지인 연극반 선배가 무대 보수 일을 시키더라고요. 그러다 "야, 라면 먹고 해" 그러길래 라면 먹다가 자연스레 통성명을 하게 됐고, 본의 아니게 연극반에 들어가게 됐죠. 근데 군대 다녀오기 전까진 스태프만 했어요. 거기서 숙식 일을 다 하며 주로 조명일을 거들었고요. 말더듬은 여전했지만 거기 사람들 만나며 점차로 소통 가능한 쪽으로 내 자신이 변해가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보이첵'을 연출할 수 있었고 '로미오와 줄리엣' 로미오로 무대에도 섰고요. 밤이면 최형인 선생의 '백세개의 모노로그'를 달달 외우며 연습했어요. 그러면서 점차로 연극이 좋아졌는데, 말더듬이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난 건 아까 말한 전역 이후 '코뿔소' 덕입니다.
-앞서 오른쪽 눈이 심한 약시라고도 하셨는데 면제 없이 군복무를 하셨네요.
▷제가 1989년 7월 군번입니다. 1991년 12월에 재대했어요. 말한 김에 이 얘기를 해줘야겠어요. 제대하고 안경맞추러 갔어요. 오른쪽 눈이 심한 약시였으니까. 안경점에서 안과부터 가보라고 하더라고요. 근데 의사가 이런 말을 하는 거야. "축하합니다. 신의 아들이시네요." 아이고, 난 이미 28개월 병장 만기 전역을 했는데, 그런 나를 곧 군대갈 놈으로 보고 면제될 거라고 축하해준 겁니다. 분하더라고요. 구타가 일상이던 당시 군대를 안 갈 수도 있었으니까. 진단 받고 갔으면 그 고생은 안 했을 테니까. 그땐 하두 병역 빼려는 인간들이 많았어요. 200만원 주면 방위, 400만원 주면 면제, 이런 말이 나돌 때였지요. 병무청서 자세히 조사 안 하던 시절이에요. 남자 인구가 워낙 많았으니까요. 학력고사를 60~80만명이 봤어요. 군대 가기엔 너무 많은 거죠. 제 세대 남자들, 덩치 크고 건강해도 좀 살았던 사람들은 대부분 방위로 빠지거나 면제였어요. 그럼 누가 입대하느냐. 전부 저처럼 못 사는 애들이죠. 제가 병역할 때 중대원 150명 중 대학 다니는 애들은 6명이었어요. 그런 친구들이 내 나이 돼서 나라 걱정하니 뭐니 그러면 속이 '니글니글'해집니다.
-연극 한다는 것에 대해 집안 반응은 어땠습니까.
▷우리 아버지가 고리타분하지 않아요. '네 하고싶은 거 하라'는 주의였죠. 하지만 제가 마흔 가까이 되니 힘들어 하시죠. '이제라도 뭘 해라'고 하시는데 고통스럽더라고요. 설날, 추석 명절 때마다 제가 눈에 밟히시니 꼭 한 소리를 하시고. 그럴 때마다 저를 지켜준 분이 어머니세요. 어머니는 늘 아버지에게 순종적이셨는데, 정말 한 번은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큰 소리를 지르셨어요. 막내한테 뭐라하지말라고, 하고 싶은 거 하게 내버려두라고. 아버지가 그렇게 깜짝 놀라시는 걸 처음 봤습니다. 엄마한테 나중에 "그때 왜 그러셨어요, 아버지한테"하고 슬쩍 여쭈었죠. 그러니 이런 이야기를 풀어놓으십디다.
-어떤 이야기를요?
▷하두 답답해서 동생(이모)이랑 왕십리에 용하다는 점집을 갔대요. 가자마자 점 봐주시는 분이 "아이구, 막내 아들 때문에..."라며 혀를 끌끌 차시더라는 겁니다. 신뢰가 생기죠. 저에 대해 얘기도 안 꺼냈는데 "막내아들이 답답해 죽겠지, 나이 쳐먹었는데 돈도 못 벌고 어떡하냐"며 말을 쭉 이어가더랍니다. "하나만 기억해, 걔는 스트레스 주면 죽어, 걔는 다른 덴 건강한데 정신적으로 영향을 주면 아주 위험해지는 친구야, 스트레스만 안 주면 알아서 자기 길 찾아 갈거야, 그리고 꽤 유명해질거야. 책에도 남을 사람이야. 근데 아니면 죽는다고." 이 얘기를 듣고 생전 처음 어머니가 어비지께 큰 소리를 지른 겁니다.
그의 20대로 다시금 시계태엽을 돌려야 할 것 같다. 때는 바야흐로 1994년. 4학년 1학기 무렵인 스물 여섯 정인겸은 생애 첫 대학로 무대에 선다. 극단 연우무대에 입단하고부터다. 십수년 간 지속된 말더듬도 해결됐기에 본격적인 연극인으로서 삶에 닻을 올린다. 하지만 말더듬에서만 해방됐을 뿐, 새로운 시련들이 이어진다. 한 편 한 편 작품들을 올리고 박상현 연출의 '난 새에게 커피를 주었다' 등에 출연하며 저만의 화술을 닦아갔으나, 이후 심한 교통사고를 당하고 만다. 건널목을 건너던 중 신호를 무시한 버스에 그만 치인 것이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으나 발등뼈가 일곱 군데 부러졌다고 한다. 그는 "4개월 간 누워있었다"며 "버스기사 노모가 눈물로 선처를 호소해 그냥 봐줄 수밖에 없었다"고 회고했다. 그렇게 퇴원 후 기국서 연출의 '관객 모독', 김광림 연출의 '날 보러 와요' 등에 출연하며 재기한다. 입단 6년 후에는 연우무대를 나왔고, 지금껏 70여편의 연극 무대에 올랐다. 하지만 나이 마흔 다섯에 이르기까지 그가 모은 돈은 200만원이 전부였다.
-젊은 시절 주변에서 보는 정인겸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연극계에 '이상한 놈'으로 소문이 자자했죠. 혜화동 로터리에서 플라타너스 나무를 쓰다듬으며 혼잣말 많이 했어요. "어이구, 매연 많이 맞았겠구나" 하며. 이유가 있어요. 20대 후반, 서른살 초반에 보면 서로 무대에 서려고 발악하고 수싸움하며 관계를 맺고 하는 게 뻔히 보여요. 선배는 잘 하는 후배 누르려고 하고. 그 정체된 상태가 싫더군요.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연습 전에 30분 동안 바깥에 플라타너스 나무를 쓰다듬거나 기대 앉아서 혼자 읊조렸죠. 힘이 나더라고요. 휘둘리지도 않게 되고. 연극계는 없는 곳이잖아요. 알려지지 않은 곳이고요. 그런 데일 수록 타인에게서 뽑아낸 에너지로 살아요. 저는 그게 그 시절부터 보였어요. 그 에너지를 빼앗기지 않으려 저항 많이 했어요. 또래들 사이에선 외톨일 수밖에 없었죠.
-배우님의 30~40대에 있어서 가장 혹독히도 힘들었던, 소위 바닥을 친 순간이 있다면 그건 언제였습니까.
▷나이 마흔 막 넘겼을 무렵입니다. 아주 밑바닥을 쳤죠. 제가 밑바닥 친다고 한 것은 정말 사나흘 먹을 것이 없다는 거예요. 방바닥, 장롱밑 박박 긁어서 동전이라도 구하면 라면 사러 가서 겨우 끼니를 해결해야 했죠. 그게 6개월 이상 지속된 겁니다. 그때 제가 하수구를 많이 들어갔어요. 중구 필동 진양상가 쪽에서 하수구 작업은 제가 거진 했어요. 저 같이 체구가 작은 애들을 써요. 근데 쪽팔리지만 여기가 일당이 셉니다. 어지간한 잡역부도 안 하려고 하니까. 뭔가 막혀 있는 것들을 똥물 속에서 꺼내야 하는데 누가 하고 싶겠어요. 들어가기 전에 소주 들이붙고 마스크 쓰고 했어요. 다른 노가다가 8만원이었다면 이 일은 2배 정도 받았던 것 같아요. 그걸로 담배, 라면, 김치, 쌀, 소주를 사서 버티는 거죠.
-결혼을 원해도 하기 힘든 여건이었겠네요.
▷연극판이 돈이 없죠. 재밌는 얘기가 있어요. 이 동네가 이혼률이 굉장히 적어요. 왜인 줄 아세요? 이혼하려면 나눠먹을 아파트(재산)이라도 있어야 할 텐데, 서로 한 푼도 없는 경우가 다반사여서에요. 가를 게 없는 거지.
-듣고보면 정말 세상의 밑바닥을 실체적으로 경험하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또 그 주어진 현실에 절망하지 않고 달관하며 사신 것 같고... 그게 또 경이적이고...
▷하수구 들어가 일하고 번 돈으로 옥탑방에서 소주 한 잔 마시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하, 인생 이런 거구나, 재밌네." 성북구 정릉 살 때 얘기에요. 40대 초반 때였지요. 거기서 4년 살았는데 궁핍하기도 했고, 워낙 산골짜기였어요. 거기서 늘 그렇게 혼자 사는데 창문만 열면 새가 보였어요. 정릉에 딱따구리랑 박새 많은 거 알아요? 얘네들 위해 호박씨를 사와서 창가에 뿌려놔요. 아침에 문 열면 다 먹고 없죠. 연립주택 3층 옥탑방이었는데요. 상황적으로 도저히 여자를 만나기 힘든데 성욕은 들끓고, 젊음은 무심히 흘러가고, 그때 이 작은 새들이 제 벗이었던 겁니다. 그러다 3년 전부터 돈을 좀 벌기 시작하면서 사람 구실을 하고 있고요.
2015년은 그에게 인생 2막을 알린 중대한 분기점이다. 최동훈 감독에게 발탁돼 '암살'(2015)의 사사키 역에 출연한 것이다. 연극 배우 출신이 '도둑들'(2012)을 찍은 이 천만 감독 눈에 띄어 조연 역에 발탁되는 건 드문 일이다. 그렇게 1270만명을 모은 '암살'은 정인겸이라는 얼굴을 온 대중 기억 속에 자리잡게 한 일대 계기가 된다. 그가 연극 배우에서 영화 배우로서 새 삶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도 이때부터다.
최동훈 감독의 `암살`(2015)은 배우 정인겸을 연극 배우에서 영화 배우로 본격 이행하게 해준 대표작이다. /사진제공=쇼박스

-'암살' 이후 연극에서 영화 매체로 본격 이행하신 셈인데.
▷연극에서는 이제 아버지 역할을 할 나이가 되었는데 보시다시피 전 아버지 느낌이 아니잖아요. 이상하잖아요. 제가 영화 매체로 옮긴 건 어떻게든 먹고 살려고였어요. 그러다 최 감독이 미팅 하자고 연락을 줬어요. 오디션도 아니고요. 최 감독 사무실에서 한 시간 가량 담배 빡빡 피며 얘기했죠. 이런 얘기가 오갔답니다. "힘드셨죠 선배님?"(최동훈) "아뇨, 제가 택한 일인데 어쩌겠습니까. 노가다도 제가 택해 한 거 아닙니까."(정인겸) "선배님, 제가 생각하기에는요, 선배님 마흔 후반에 오시길 참 잘했습니다."(최동훈) "왜요?"(정인겸) "보세요, 서른 다섯 즈음에 영화 시작한 선배님 친구들, 지금 남아 계신 분 누가 있습니까. 몇 명 없지 않습니까. 조폭, 형사처럼 에너지 빡빡, 인상 빡빡 쓰다가 빨리 소비되지 않습니까."(최동훈) 맞는 말이었어요. 이 영화 산업 시스템이라는 게 그런 에너지 쓰는 역할을 많이 필요로 해요. 시켜주니 넙죽 하지만 대부분 소비됩니다. 그러다 에너지 쓰는 인물로만 고정돼요. 더 깊이 연기할 수 있는 사람들 마저도요. 우리는 그걸 "이미지가 빨린다"라고 표현합니다. 최 감독이 그러더군요. "선배님은 47세 정도에 '턴'하셨지요. 이미 캐릭터도 갖고 오셨지요. 그 캐릭터가 너무 독특하시고요. 남하고 비교가 안 되는 꼭 필요한 캐릭터를 이미 만들어 오셨어요. 선배님이 단역이 아닌 조연부터 하셔야 하는 이유입니다. 정말 잘 하신 겁니다." 그때 느꼈지요. '아, 일찍하는 게 능사가 아니로구나.'
최근 종영한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에서 배우 정인겸은 하야시 공사를 열연해 주목받았다. /사진제공=tvN

-그렇게 이제 막 50대가 되셨어요. '암살' 이후 출연작도 계속 늘고 계시고요. '살인자의 기억법' 김병수 부친, '범죄도시' 법의학자, '골든 슬럼버' 백발, '7년의 밤' 박수무당, 그리고 이번에 '안시성'과 '협상'까지 출연하셨고요. 드라마도 2016년 '미세스 캅 2'에 이어 지난해 '추리의 여왕', 최근 종영을 앞둔 화제작 '미스터 션샤인'에서 조연 하야시 역으로 존재감을 안방극장으로까지 알리고 계시고요. 이미 영화계에선 나이로 보나 연기 경력으로 보나 선배보다 후배가 더 많으실 것 같은데요. 돌이켜 보건대 이 모든 게 어떻게 다가오십니까.
▷자존심 같은 건 필요 없어요. '이 판서 진짜 살아남아야 한다. 내가 살 곳은 여기 뿐이다'라는 절박감으로 임해요. 절박하니 겸손해질 수밖에요. 저는 영화 촬영 현장에서 새벽에 제 촬영분이 끝나도 두 세시간을 현장을 지켜요. 그게 예의라고 여겨서에요. 그리고 전 모니터룸에 아예 안 가요. 조연출이 혹여나 한 번 부르면 갈 뿐이에요. 감독이 보통 저보다 연배가 어린데 제가 한 마디라도 얹으면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연극은 보통 세 달전부터 같이 연습하며 작품을 '세운다'고 해요. 어떤 모양으로 최종적으로 세워질 진 예측이 안 되니 서로 함께 토의하고 계속 리허설하고 수정하면서 작품 하나를 세워나가요. 그런데 영화는 다르지요. 한 여배우가 이런 말을 TV에서 하더군요. 딱 맞는 말이예요. "드라마나 영화 쪽에서 감독과 연출가는 드론을 저 하늘 위로 띄워서 결과물을 멀리서 지켜보는 거다." 이미 90% 이상은 명확한 그림을 그려놓고 간다는 거죠. 한 사람 배우로서 저는 거기에 맞게 소화해주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지난 과거를 반추할 때 배우님은 어떤 사람이 되어 있는 것 같습니까.
▷일단 호르몬이 떨어지니 실수를 안 합니다. 바보같은 짓과 현명한 짓이 구분이 되는 겁니다. 남자가 그 전까진 자기가 자기 주인이 아니에요. 호르몬이 주인이지. 사회 관계에선 늘 경쟁심에 휘둘리죠. 바보 같은 짓이라고 봐요. 저는 그 시절 혼자 노가다하며 지내다 어느새 나이가 들어버렸는데, 2~3년 전부턴 본능이 잘 제어가 되는 것 같아요. 덜 무례해지고, 부러 노력 없이도 후배들에게 편안한 선배로 다가가는 것 같고. 저 자신이 통제가 되니 전체가 명쾌하게 보이고, 가식이 아닌 본질을 보게 되고, 객관적으로 조망을 하게 되고요. 평정심이 유지된달까요.
-그게 연기에도 모종의 영향을 주지 않을까 짐작하게 되는데요.
▷2~3년 전부터 발음을 흐리고 있어요. 영화 매체에 적응하려고요. 연극은 발음을 또박또박 모든 음절을 정확하게 해요. 딕션이 중요하니까. 영화에선 그게 아주 안 좋아요. 흘려야 해요. 그래서 부러 노력하는 거죠. 그리고 감정적인 연기를 제가 별로 안 좋아하는데요. 감정은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새어나오는 것이라 봅니다. 그걸 관객이 알아챌 정도로만 새어나오게 하는 거. 요즘 젊은 관객은 '클리셰의 감별사'예요. 뻔한 감정 연기로는 안 되는 겁니다. 점점 더 이성적으로 연기하게 돼요. 이성을 컨트롤 함으로써 독특함이 나오고 클리셰에 안 빠지는 거거든요. 감정은 맹목적이고 폭발적인 힘이 있지만 그만큼 단순한 겁니다. 저는 이제 자제하고 들키지 않으면서 이 미묘하게 새어나오는 것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연기를 그만 두고 싶었던 적 없었냐"는 물음에 그는 "전혀"라고 잘라 말했다. 할 줄 아는 것이 달리 없었다는 것이다. 이 말을 바꿔 말하면 연기야 말로 그의 생애 전부라는 뜻일 것이다. 그는 한 편 한 편 작품들에 출연하며 스스로의 삶이 고양되는 것을 느낄 때 묘한 쾌감을 느낀다고 했다. 아마도 그 쾌감의 너비와 폭은 앞으로 더 늘어나지 않을까. 생의 바닥을 딛고 선 이 작은 거인이 펼쳐 보일 생애는 그만큼 더 진실할 것이기에. 그 진실함 만큼이나 사람 냄새 나는 그의 소탈함을 온 대중은 기꺼이 반길 것이다. 그는 영화계의 보헤미안이자, 조르바이지 않은가.
[김시균 문화부 기자][ⓒ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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