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잡아라 잡(JOB)] "피규어 좋아하면 철딱서니 없는 어른인가요? 전 아닌데…"
입력 2018-10-01 13:30  | 수정 2018-10-04 07:59

저출산으로 침체기에 빠진 완구업계에 '키덜트족'이 대체수요로 떠오르고 있다. 아이(kid)처럼 장난감이나 조립식 완구 등을 모으는 어른(adult)들이야말로 충성도 높은 매니아적 기질에, 탄탄한 소비력까지 갖춰 반드시 포섭해야 할 대상으로 부상한 것이다.
하지만 키덜트 사업의 성공 사례로 꼽을 만한 것을 찾자니 마땅치가 않다. 많은 유통기업들의 발빠른 대처에도 아직까지 내세울만한 가시적인 성과로는 부족하다는 게 업계의 시각이다.
롯데마트 김경근(사진) 상품기획자(MD)는 그 이유에 대해 "'키덜트'란 말 자체부터 틀려 먹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애어른' 이란 뉘앙스를 풍기는 키덜트란 말에 거부감이 드는 소비자가 많다는 것이다.
때문에 키덜트 사업이 성공하려면 어른들의 당당한 취미생활로 접근해야한다는 것. 롯데마트의 완구 카테고리 특화매장인 토이저러스가 최근 유아동 중심의 장난감 매장에서 성인들의 취미 전문숍으로 거듭나고 있는 배경이다.

김씨는 롯데마트 토이저러스에서 '로보트 태권V 피겨 메탈릭 버전(2017년 7월 출시·2000개 한정)', '로보트 태권V 전문가용(2017년 10월 출시·500개 한정)', '토이저러스 합금 1호 아스트로 강가(2018년 1월 출시·200개 한정)'등 액션 피규어를 기획해 '완판 기록을 세웠다. 피규어로 단기간에 수십억원의 매출을 올려 대기업 유통업체로서는 보기 드물게 흥행에 성공했다.
최근엔 토이저러스 합금 2호 태권V 2000개를 사전 예약 판매 중으로, 이 역시 완판을 눈앞에 두고 있다. '천천히 그렇지만 확실하게' 업적을 쌓고 있는 그를 만나 더 자세한 얘기를 들어봤다.
"키덜트를 한국어로 번역하면 '애어른'이라는건데, 다 큰 어른을 철딱서니 없는 애어른으로 취급하면 누가 비싼 돈 들여 피규어를 사겠어요? 뭔가 한가지에만 홀려있는 오타쿠로 몰아가면 공개적으로 사기가 더욱 곤란하죠."
'체면' 문화가 중요한 우리 사회 분위기를 생각해보니 김씨의 말에 수긍이 갔다. 현재 피규어 수집가들은 피규어 원형사가 온라인 카페 등에 샘플을 올리면 판매자의 계좌번호로 돈을 입금해 공동 구매하고 있다.
실제 피규어가 제작되기까지 최소 석달에서 최대 1년까지 걸릴 수 있지만 이들은 '나만의 작지만 확실한 행복(소확행)' 아이템인 피규어 수집을 위해 마냥 기다린다. 이같은 매니아층의 마음을 악용해 돈을 떼먹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지보다는 음지에서의 거래가 편하다는 피규어 매니아들. 애어른 취급을 받기 싫어서일테다.
토이저러스 합금 2호 로보트 태권V 피규어 [사진제공 = 롯데마트]
김 씨는 그런 키덜트를 양지로 끌어냈다. 키덜트란 말 대신 성인들의 취미생활로, 이른바 '하비(hobby)족'으로 접근해 가능한 일이었다. 실제로 롯데마트 내부적으로는 키덜트란 말 대신 하비족을 선호한다. 독자 합금 피규어 브랜드 '토이저러스 합금' 을 출시하는 내내 그랬다. 아예 하비족을 겨냥한 전문숍을 낼 계획도 있다. 어른들의 건강한 취미생활로 생각하니 키덜트 사업 영역이 훨씬 더 넓어졌다.
"제 주변만 봐도 그래요. 비싼 돈을 주고서라도 피규어를 수집는 이들을 보면 전문직 종사자들이 많아요. 대기업에 다니는 분도 물론 있고. 피규어 관련 커뮤니티 일을 열심히 하는 이들 대부분은 일정한 직업이 있고 직업상 제 역할을 충실히 해내는 분들이에요. 그런 분들에게 피규어 수집은 일종의 취미죠.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마음의 안식을 찾을 수 있는 취미 말이에요."
김씨는 키덜트 사업이랍시고 각종 피규어를 '단독 판매'만 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진짜 매니아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피규어를 처음부터 기획해 팔고 싶었다. 이를 위해 피규어 문외한이었던 그는 관련 커뮤니티 가입을 했다.
롯데마트 토이저러스 MD란 신분을 내걸고 전문가들에게 다짜고짜 '한 수 가르쳐달라'고 쪽지를 보냈다. 무림의 고수들은 당연히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대기업이 하면 얼마나 하겠냐' '키덜트 사업이라고 흉내만 내다 말겠지' 등의 회의적인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그의 끈질긴 구애에 고수들이 하나둘씩 마음을 열었다. 온라인에서 알음알음 이뤄지면서 돈을 떼인 경험이 한두번씩은 있던 매니아들 사이 롯데마트란 기업의 참여로 거래의 신뢰를 높이고자 한 기대감도 컸다.
김씨가 국내 로보트 태권브이 피규어 제작자로 최고 평가를 받는 김경인 작가나 '태권V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김청기 감독, '대인전기 무혼'으로 국내 피규어계를 놀라게 한 홍성혁 작가 등을 섭외한 비결이다. 나아가 액션 피규어계의 끝판왕인 일본 반다이의 '초합금' 브랜드에 도전하게 된 힘이기도 하다.
"제가 단순히 피규어 판매만 했다면 여타 유통기업들이 밟은 전철을 그대로 따라갔을 거에요. 정말로 매니아들이 좋아할만한, 나아가 대중적으로도 사랑받기 충분한 피규어 제작을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어요. 전문가들의 얘기를 듣고 또 듣고 또 들었죠. 제가 잘 모르니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기'였지만 그래도 즐거웠어요."
그는 게임 피규어 판매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지난해 11월 내놓은 게임 피규어 블레이드앤소울은 출시 한달 만에 3만개가 판매되며 12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10대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좀비고등학교 피규어는 출시 일주일만에 2만개가 팔렸다. 흔히 MD들이 '좋아하는 사람을 결코 이길 수 없다'는 말을 하는데, 딱 김씨가 그랬다.
오는 12월말 출시를 앞둔 `재믹스 미니` [사진제공 = 롯데마트]
게임을 좋아하는 그는 최근 미니 게임기의 성공적인 기획으로 유통업계 뿐 아니라 게임업계에서도 주목을 받고 있다. 앞서 그는 오는 12월말 국산 게임기 '재믹스'의 정통을 잇는 '재믹스 미니'를 토이저러스 몰에서 사전예약 판매한다고 발표했다. 해외에서 네오지오, 패미컴 등 고전 게임기를 부활시킨 미니 게임기들이 연이어 히트하자 재믹스 미니 출시를 기획한 것이다. 제작을 위해선 네이버 카페 '구닥동'에 소속된 인디 게임기 제작팀 네오와 손을 잡았다.
"사실 재믹스는 더 이상 새로울 게 없는 옛날 게임이에요. 하지만 70~80년대생들에게는 유년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아련한 그 무엇이죠. 저부터도 6살때 어머니에게 처음 선물을 받은 게임기가 재믹스에요. 게임기 하나로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듯 했던 경험을 수십년이 지나 다시 할 수 있게 됐으니 가슴이 벅찰 수밖에요."
김씨에 따르면 우리나라 게임 인구는 적어도 50만명에 달한다. 액션 피규어 매니아들(2000여명으로 추산)의 규모 대비 250배 수준이다. 게다가 게임을 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관련 캐릭터 상품에 대한 소장 욕구가 크다. 롯데마트가 향후 집중할 분야로 미니 게임기를 포함한 게임 관련 다양한 굿즈를 손꼽는 이유다.
"게임 역시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즐겨하는 취미생활이라고 생각해요. 하비족들에게 결코 빠질 수 없는 분야죠. 단언컨대 재믹스 미니는 1시간만에 완판될 거에요. 서버 다운을 우려하고 있는데요 뭘…(웃음). 지금까지 무늬만 키덜트 사업을 해왔던 곳들과는 달리 롯데마트에선 성인들의 건강한 취미 생활을 돕고 싶어요. 나아가 다양한 취미생활을 소비자에게 제안해보려고요. 핫한 키덜트 상품을 사려면 반드시 롯데마트 토이저러스로 오게끔 노력하겠습니다."
추위가 한창일 12월, 따끈따끈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내놓겠다고 자신감 넘치게 말하는 그를 통해 롯데마트 토이저러스의 다음 변신을 기대해 본다.
[디지털뉴스국 방영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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