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악필도 환영…손 끝으로 느끼는 마음의 평화 짜릿"
입력 2018-09-17 14:55 
차분히 앉아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캘리그래피'는 활동적인 취미보다 잔잔한 취미를 찾고 있는 직장인들에게 안성맞춤이다. [사진 = 김수연 인턴기자]

지난 7월부터 '주 52시간 근무제'가 시행과 함께 '워라밸'과 '소확행'을 중시하는 직장인들이 늘어나면서 '나'를 위한 소비를 하는 2030세대가 증가하는 추세다. 여가 시간을 오롯이 자신을 위한 재충전 시간으로 활용하려는 직장인들은 기존의 정형화된 취미 활동에서 벗어난 새로운 영역의 취미 활동 공간에 발을 내딛고 있다. 매경닷컴은 직장인들 사이에서 떠오르고 있는 이색 취미 활동을 밀착 취재, '직장인 취미열전' 코너를 통해 생생한 체험기를 소개한다. <편집자주>
격하게 몸을 움직이는 활동적인 취미보다 잔잔한 취미를 찾는 직장인을 중심으로 '직장인 미술'이 인기를 끌고 있다. 유통업계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문화센터의 워라밸 테마 강좌 수강생은 전년 대비 40% 가까이 늘어났다. 최근 제도 변화에 발맞춰 기존에 수채화·유화 등 회화 정규 강좌 위주로 진행하던 미술 분야 강좌에 웹툰·팝아트·일러스트 등 젊은 층이 선호하는 콘텐츠가 추가되기도 했다. 이 같은 취미 활동 중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캘리그래피'는 온종일 직장 상사, 동료, 협력업체 직원 등 수많은 사람과 '과도한 소통'에 시달려 피로함을 호소하는 직장인들에게 안성맞춤이다.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며 손끝으로 심신의 평화를 체험할 수 있는 캘리그래피는 '현대판 서예'라 부를만하다. 꼭 거금을 투자하고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시작할 필요는 없다. 거창한 무언가보다 소소한 행복을 찾는 이들에게 캘리그래피를 추천한다.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시울캘리그래피'. 김기환 캘리그라피 작가가 3년 전부터 캘리그래피 강습을 위해 운영 중이다. [사진 = 채민석 인턴기자]
지난 13일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한 캘리그래피 교실에 들어가자 액자 속 크고 작은 글씨들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모두 같은 검은색 글씨였지만 굵기, 기울기, 간격에 따라 서로 다른 분위기를 자아냈다.
'시울캘리그라피'를 운영하는 김기환 캘리그래피 작가는 초보에게는 자신감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을 건넸다. '똥손'이라 자평하며 평소 악필임을 걱정하는 기자에게 김 작가는 일단 펜을 들고 써보는 시도가 중요하다고 재차 강조했다. 김 작가는 "처음 배우는 분들 중 악필이라 걱정하는 분들이 많은데 오히려 유리할 수 있다"라며 "정형화되지 않은 캘리그래피 글씨체에 익숙해지다 보면 평소 글씨체에 대한 자신감도 같이 올라가게 된다"라고 위로했다.
캘리그래피는 사용하는 펜에 따라 천차만별의 분위기를 낸다. 캘리그래피 용 펜이 따로 있지만 모든 펜으로 작성 가능하다. [사진 = 채민석 인턴기자]
장인은 도구를 탓하지 않는다지만 다양한 캘리그래피 펜을 꺼내드는 김 작가의 손짓에는 설렘이 한가득이었다. 본격적인 캘리그래피 수업에 들어가기에 앞서 작품의 성공 여부에 일조하는 '도구', 펜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캘리그래피의 특징은 글씨에 '감정'이 담긴다는 점이다. 캘리그래피는 한 가지 펜으로 다양한 표현이 가능하다. 글을 쓰는 자세, 펜을 쥐는 손의 방향, 펜촉의 재질, 굵기, 닿는 면적, 펜의 각도, 강약 조절 등에 따라 천차만별의 서체를 표현할 수 있다. 흔히 붓펜이라고 불리는 브러시펜이 몸 쪽을 향해 와 있을 경우 글씨의 앞머리는 일자로 시작한다. 평소 연필을 잡듯 옆으로 펜을 쥘 경우 앞머리가 비스듬하게 표현된다. 펜을 쥐는 방향에 따라 글씨의 분위기가 달라지는 것이다.
한 가지 펜으로 다양한 글씨체를 선보이고 있는 김기환 작가. 펜을 쥐는 방향, 펜촉의 재질, 굵기 등에 따라 다양한 서체를 구현할 수 있다. [사진 = 채민석 인턴기자]
펜촉의 재질에 따라서도 다른 감정의 글씨 구현이 가능하다. 스펀지 펜촉의 경우 모필 펜촉에 비해 갈라지는 느낌이 적어 정제된 느낌의 글씨를 쓰고 싶을 때 적합하다. 하나하나 선을 그어가며 비교해보니 차이가 확연히 느껴졌다. 스펜지 펜촉의 펜을 사용할 경우 귀엽고 풋풋한 감정을 지닌 서체가 표현된다. 모필은 한 올 한 올 붓모가 살아 있어 거친 느낌의 글씨로 나타난다. 좀 더 거칠고 슬픈 분위기의 글을 작성할 때 적합하다. 이런 사소한 디테일이 모여 하나의 캘리그래피 작품이 완성된다.
캘리그래피가 생전 처음이라면 '따라 쓰기'로 기초를 잡는 것을 추천한다. 트레이싱지를 위에 올리고 따라 쓰다 보면 마음의 안정까지 느낄 수 있다. [사진 = 채민석 인턴기자]
펜을 잡는 방법조차 서툰 캘리그래피 입문자에게 실력을 올리기에 '따라 쓰기'만큼 제격인 방법이 없다. 용지가 얇아 잘 비치는 트레이싱지를 위에 두고 전문가의 글씨를 따라 쓰다 보면 어느 정도 캘리그래피의 기초를 잡을 수 있다. 손에 익숙해질 때까지 글씨를 쓰다 보니 긴장됐던 마음이 사그라들고 잡념이 사라졌다.
김 작가 역시 이런 매력에 매료돼 취미로 캘리그래피를 시작했다 업으로 삼은 경우다. 그는 "캘리그래피와 전혀 관련 없는 학과를 전공했지만 진입장벽이 낮아 재미로 시작했다 캘리그래피 작가까지 이르게 됐다"라면서 "다른 격한 액티비티 활동과 다르게 앉아서 차분히 스스로를 돌아보며 작품을 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라고 말했다.
김수연 인턴기자가 작성한 캘리그래피를 첨삭해주고 있는 김기환 작가. 전문가에게 배움으로써 보다 빠르고 정확한 성장이 가능하다. [사진 = 채민석 인턴기자]
다소 정적인 활동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차별화 포인트는 캘리그래피만이 지닌 '감성'에 있다. 세상에 하나뿐인, 직접 만든 유일무이한 작품이라는 점이 성취감을 잃은 직장인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과거 문인들이 서예를 하며 마음의 안정을 찾듯 직장인들은 캘리그래피를 힐링의 수단으로 이용함으로써 대인관계, 업무 등으로 인해 느낀 스트레스를 해소한다.
서울 목동에 거주하는 40대 직장인 주모씨는 근무 시간을 조정해 오전 시간대에 캘리그래피 교실을 찾았다. 주씨는 "가만히 앉아 글씨를 쓰고 있으면 잡념이 사라진다"라면서 "원래 취미는 사진 촬영인데 사진 뒤에 그 분위기에 맞는 글을 직접 작성하고 싶어 캘리그래피를 배우게 됐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필기구를 어떤 방식으로 사용하는지에 따라 분위기가 다르게 나타나는 점이 좋다"라며 "앞으로도 꾸준히 취미 활동으로 삼을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김 작가는 "최근 직장인분들의 수강 신청이 부쩍 늘었다"라면서 "캘리그래피는 시·공간 제약 없이 자유롭게 즐길 수 있는 취미 활동이기 때문에 부담이 적은 것이 장점"이라고 덧붙였다.
[디지털뉴스국 김수연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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