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3일 서울 삼청동 갤러리현대 2층에서 하얀 청계가 파드닥거렸다. 매일 푸른 달걀을 하나씩 낳으면서 우는 생닭을 전시장에서 보니 놀라웠다.
모이통에 묶어놓은 이 청계가 3일 동안 주변 횟가루 위에서 움직인 흔적이 바로 한국 실험 미술 대표 작가 이강소(75) 작품 '무제-75031'. 1975년 제9회 파리비엔날레를 뒤집어놨던 작품이다. 당시에는 파리에 살던 '물방울 작가' 김창열이 인근 농장에서 구해왔다고 한다. 파리시립근대미술관에서 닭이 남긴 시간의 흔적을 담은 설치물을 전시했다. 관객들이 닭의 행방을 궁금해하면서 화제가 되자 작가는 프랑스 제2국영TV 9시 뉴스에 닭을 들고 나가게 됐다.
닭의 행동 범위를 제한해 존재의 한계도 드러낸 이 작품이 43년 만에 서울에서 재연됐다. 9월 4일부터 10월 14일까지 열리는 개인전 '소멸'에서다. 닭 작품 외에도 선술집 등 1970년대 주요 퍼포먼스와 설치 작품을 다시 복원했다.
(서울=연합뉴스) 강민지 기자 = 23일 서울 종로구 갤러리현대에서 열린 이강소 개인전 '소멸' 간담회에서 이 작가가 전시를 소개하고 있다. 이번 ...'>
이강소 개인전 '소멸'
(서울=연합뉴스) 강민지 기자 = 23일 서울 종로구 갤러리현대에서 열린 이강소 개인전 '소멸' 간담회에서 이 작가가 전시를 소개하고 있다. 이번 전시는 이 작가의 실험적인 시도가 돋보인 첫 개인전 '소멸(선술집)', 닭 퍼포먼스 '무제-75031' 등 1970년대 대표작 10점을 오는 9월 4일부터...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거의 반세기가 다 되가는 작업이 지금도 통용될 수 있는지 관객 반응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서울=연합뉴스) 강민지 기자 = 23일 서울 종로구 갤러리현대에서 열린 이강소 개인전 '소멸' 간담회에서 이 작가가 전시를 소개하고 있다. 이번 전시는 이 작가의 실험적인 시도가 돋보인 첫 개인전 '소멸(선술집)', 닭 퍼포먼스 '무제-75031' 등 1970년대 대표작 10점을 오는 9월 4일부터...
갤러리현대 1층에는 선술집이 차려져 있다. 낡은 나무 탁자 위에 마른 안주와 재털이, 성냥갑 등이 놓여 있다. 1973년 작가의 첫 개인전이 열린 서울 명동화랑에서 선보인 '소멸(선술집)'을 다시 차린 것이다. 당시 관람객들이 의자에 앉아 막걸리와 안주를 먹고 담배를 피면서 작가의 퍼포먼스에 참여했다. 이번 전시 개막일에도 막걸리와 안주를 팔 예정이다.
작가는 "서른 살 때 깨끗한 갤러리에서 뭘 해야 할 지 몰라 내가 좋아하는 선술집을 차렸다. 나는 멍석만 깔아놨을 뿐이고 관람객이 즐겨야 작품이 완성된다. 개념 미술이 아니라 체험 미술이다. 마음 대로 상상하고 움직이면 된다"고 설명했다.
'무제-75031'
1층 전시장 입구에는 진짜 사과 더미가 짚단에 놓여 있다. 1974작 '생김과 멸함(사과 1개 50원)'의 부활이다. 사과 유통 과정을 갤러리에 옮겨 놓은 작품으로 관람객이 1개당 2000원에 구입할 수 있다. 사과와 막걸리, 안주 판매 수익금은 유니세프와 초록우산어린이재단에 기부된다.1970년대 군부 독재 시절 청춘을 보낸 그는 억눌린 세상을 자유로운 예술로 표출했다. 국립현대미술관에 조기를 말리기도 했다. 바로 1972년 제3회 'AG(아방가르드협회)'에 출품한 설치 작품 '굴비'다. 당시 검은색 관 뚜껑 위에 굴비 한 축을 설치해 억울한 죽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이번에는 조기가 너무 비싸 부세 8마리를 엮어 전시장 벽에 매달았다. 새끼줄에서 빠진 한 마리의 흔적을 흰색으로 그려놓았다. 작가는 "우리집 바둑이가 눈 깜짝 할 사이에 아득아득 씹어먹어버렸다"며 "1972년에는 전시가 끝난 후 국립현대미술관 직원들이 술안주로 먹었다"고 말하며 웃었다.
전시장 지하 1층은 하얀 갈대밭으로 변해있었다. 1971년 제2회 'AG'에 출품했던 설치 작품 '여백'으로 소멸되어가는 갈대들을 흰 석고와 시멘트로 고착시켰다. 박제된 자연을 통해 상실과 죽음의 이미지를 전달한다.
고향인 대구 낙동강에서 갈대를 가져온 작가는 "여름에는 잎이 아주 싱싱하고 생명력이 넘치지만 겨울에는 스산해진다. 1970년대 현실을 마주할 때 오는 허무감과 존재감을 표현했다"말했다.
전시장 2층에는 벌거벗은 작가의 몸에 물감을 바른 후 캔버스 천으로 닦아낸 1977년 누드 퍼포먼스 '회화' 사진이 걸려 있다. 작가는 "내 몸을 닦으면 자화상이 되지 않나"라고 말했다. 지금 재연할 생각은 없냐고 묻자 "너무 늙어서 징그럽지 않을까"라고 답했다.
실험 미술에 청춘을 불사른 작가는 1980년대부터 오리와 사슴 그림, 찰흙을 던진 후 굽는 조각에 매진해왔다. 겨울철 과천 동물원 웅덩이에서 파닥거리던 오리, 대구 서문시장에 약재로 팔려나온 사슴뼈에 영감을 받은 작가는 "기운 생동하는 생명체를 그린다. 일단 붓을 대면 뭐가 될 지 몰라, 한순간에 그린다"고 했다.
[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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