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종 평창아트갤러리 대표
김세종 평창아트갤러리 대표(62)는 30대 초반 서울 후암동에 사는 원로 서양화가 집에서 민화 '제주 문자도(文字圖)'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림에 보이는 요상한 새와 물고기 모양이 서양 입체파 대가 피카소 그림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현대 회화에서 볼 수 없는 추상성과 해학미가 단순하고 거칠게 표현돼 있었다. 농가에서 오래 사용한 탓인지 군데군데 물감이 떨어지고 땟물이 진하게 배여 있었다.제주 문자도
그림에서 받은 강렬한 인상과 감동 때문에 그날 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결국 잘 알던 표구사 주인에게 통사정해 '제주 문자도'를 구입했다. 민화를 사기 위해 그가 소장하던 4호 크기 고려 불상 복장 유물(불상 속에 있는 유물), 고려 화엄경 두루마리 등 아끼던 작품 3점과 바꿨다. 당시 800만원에 상당하던 금액이었다.그는 10대 후반부터 국립중앙박물관을 1000번 이상 찾고 국립현대미술관과 서울 인사동 화랑가에서 심미안을 키운 컬렉터였다. 추사 김정희 글씨와 겸재 정선·단원 김홍도 그림, 고려청자, 조선 백자를 수집하다가 민화에 빠져 들었다.
조선 책가도
지난 17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만난 김 대표는 "아름다움의 본질을 고민하다가 우연히 민화를 만났다. 19세기 무명 천재화가들이 권력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그린 순수한 민화야 말로 우리 그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서울 충무로에서 운영하던 광고기획 사무실을 접고 2000년 6월 평창아트 갤러리를 연 후 17년간 민화 1000여점을 모았다. 그의 민화 수집 원칙은 가격을 깎지 않는다는 것이다. 민화 가치를 아는 사람이 흥정을 하면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해방 후 30~40년 동안 민화는 1000원에서 1만원에 일본과 프랑스 등 외국으로 팔려나갔어요. 거의 헐값이었죠. 하지만 민화가 세계 최고라는 확신을 갖고 있어요. 내 눈에는 앤디 워홀(미국 팝아트 대가) 뺨치는 세계적인 현대미술, 팝 아트 같아요. 오케스트라 단원을 모으듯 하나 하나 장점을 보면서 모으고 있어요."
민화를 살리기 위해 서울 예술의전당,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과 손잡고 김세종민화컬렉션 '판타지아 조선' 전시를 연다. 그의 소장품 중에서 엄선한 문자도, 책거리, 화초, 산수, 삼국지, 구운몽, 까치호랑이, 무속화 등 70여점을 내걸었다. 8월 26일까지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전시장을 거친 후 12월 14일부터 내년 1월 20일까지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펼친다. 8월 19일까지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 열리는 '민화, 현대를 만나다'에도 김 대표의 소장품이 나와 있다.
그는 "박명자 현대화랑 회장님이 4년전 찾아와 민화를 알리는데 공감하고 비슷한 시기에 전시를 열기로 했다"며 "전시장에 나온 소장품들은 민화의 바다에서 새우 하나 꺼내놓은 것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서예박물관에서는 조선 말기 혼돈 시기에도 상상력과 창의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민화들이 관객을 맞이하고 있다. 까치의 친구가 된 익살스러운 호랑이, 생동감 넘치는 산수풍경을 담은 '관동팔경도', 형형색색 피어난 '모란도' 등에서 민화의 독창성을 만끽할 수 있다.
"원래 고수들만 민화를 좋아해요. 평생 고미술품을 수집한 사람들이나 화가들이 그 가치를 인정하죠. 운보 김기창을 비롯해 이우환(추상화 거장) 과 김종학(설악산 꽃화가) 등이 그 매력에 빠져들었죠. 저도 아름다운 민화를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헤매고 전재산을 털었어요. '왜 우중충한 민화를 모으냐'는 빈정거림도 많이 들었죠."
그는 국립민화박물관을 세우고 민화 대표작을 발굴해 세계인과 공유하자고 주장했다. 최근에는 민화 수집 보람을 담은 저서 '컬렉션의 맛'(아트북스 펴냄)을 출간했다. 김 대표는 "먼저 우리 스스로 민화 가치를 찾은 후 세계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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