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소멸의 미학 전하는 비누 조각
입력 2018-07-13 14:14 
신미경 비누작가2018.07.05 [사진 = 이충우기자]

1998년 영국 런던대 슬래이드 미술대학원. 유학생 신미경(51)은 6개월 동안 학교 로비에 우뚝 서 있는 이탈리아 조각가 에밀리오 산타렐리(1801~1886) 대리석 조각상을 비누로 똑같이 만드는 작업을 진행했다. 이 조각상 뿐만 아니라 대영박물관에서 본 그리스 로마 대리석 조각상 질감이 비누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왜 거의 영구적인 대리석을 보고 물에 닿으면 사라지는 비누를 연상시켰을까.
최근 서울 대학로 아르코미술관에서 만난 작가는 "일종의 서양 미술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고 말했다.
"서양미술을 공부했지만 저는 동양의 젊은 작가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어요. 그들의 역사 안에 전혀 편입되지 않은 이방인의 시선이죠. 서양인들이 영원무궁하고 고결하다고 생각하는 그리스 로마 대리석 조각을 감쪽같이 비누로 만들고 싶어졌어요. 이게 바로 동시대 예술이라고 생각해요."
신미경 '번역시리즈'
이 독특한 비누 조각 퍼포먼스 덕분에 졸업하자 마자 유명해졌다. 서양 고전을 독특한 현대미술로 변주한 창의적 작품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영국 헤이워드 갤러리 '예술과 패션 200년' 전시 젊은 예술가 부문에 초대받아 대영박물관 그리스 조각을 비누로 만들었다. 그 전시가 화제를 일으키면서 2004년 대영박물관 로비에서 비누 조각 퍼포먼스를 펼쳤다. 웅크린 비너스에 그의 얼굴을 붙인 조각상을 제작해 전시했다. 2007년에는 대영박물관 한국관 달항아리가 전시 투어를 떠난 빈 자리를 비누로 만든 달항아리로 채웠다.
한계가 없는 비누 조각으로 영국 미술계에 완전히 연착륙했다. 2011년 베니스비엔날레 특별전과 런던 인류학박물관, 헌츠 오브 베니슨 갤러리, 2014년 슬리포드 국립공예디자인미술관 등에 이어 지난해 5월부터 올해 2월까지 런던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뮤지엄에서 전시했다.
20년 넘게 연간 비누 30t을 사용하면서 조각 열전을 이어온 작가가 이번에는 건축물에 도전했다. 9월 9일까지 서울 대학로 아르코미술관에서 열리는 개인전 '사라지고도 존재하는'에서 폐허 풍경을 비누로 연출했다. 무너진 벽돌과 기둥 사이에 떨어져나간 조각상 얼굴 등이 놓여 있다. 폐허와 비누는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작가는 "오랫동안 시간성을 어떻게 가시화할 지 고민해왔다. 액체처럼 흐르는 것 같은 시간을 고체로 만든 작업이다. 일상에서 존재했다가 소멸되는 것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담았다"고 설명했다.
신미경 '화장실 프로젝트'
야외에서 비바람으로 마모되는 비누 조각상을 설치한 '풍화 프로젝트', 비누 대신 조각상을 문질러 손을 씻게 만든 '화장실 프로젝트'도 시간성을 표현한다. 전시장 입구에 설치된 조각상은 주변의 습기를 품어 '땀'을 흘리고 있다. 보습제 역할을 하는 글리세린이 많이 들어간 천연 비누여서 그렇다.
이번 전시작에는 비누 12t이 사용됐다. 꿀, 자스민, 바질, 만다린 등 다양한 향기를 사용해 전시장에 있으면 심신이 평온해진다. 이 전시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18년 아르코미술관 중진작가 시리즈' 일환이다.
[전지현 기자 / 사진 = 이충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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