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단독] 한국인은 대피하고 외국인은 불 꺼라?
입력 2018-05-29 17:58  | 수정 2018-05-30 10:48
서울 안암동 모 PC방 모니터 화면에 노출된 피난안내도. [사진 = 문혜령 인턴기자]

PC방에서 게임을 마치고 일어서던 대학생 백 모씨(21)는 우연히 벽에 붙은 피난 안내도를 읽고 깜짝 놀랐다. 영문 화재대피법의 내용이 한글판과 다르게 번역돼 있었던 것이다. 외국에서 10년을 거주한 그는 "두 판이 명백히 다른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며 "최근 PC방에 외국인 손님들이 많은데 정확한 영문판 대피요령을 제공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국문 피난 안내도에는 공통적으로 "'불이야'라고 외치십시오" "비상벨을 누르십시오" "낮은 자세로 신속하게 대피하십시오"라는 문구가 들어가 있었다. 반면 영문 피난 안내도에는 "REPORT THE FIRE. DIAL 119 (119에 신고하십시오)"와 "ATTEMPT TO EXTINGUISH THE FIRE (진화를 시도하십시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대피하라"는 문구는 아예 없거나 "불을 끄라"는 문구 뒤에 짧게 삽입됐다.
매경닷컴이 지난 28일 서울시 안암동에 위치한 대학가 주변 20개 PC방·코인 노래방을 점검한 결과 올바르게 번역된 피난 안내도를 사용한 영업장은 6곳이었다. 반면 다른 번역판을 사용한 업소는 8곳이었다. 한글판만 비치했거나 피난안내도를 아예 구비하지 않은 업소는 각각 4곳, 2곳이었다.
지난 2015년 1월 개정된 다중이용업소의 안전관리에 관한 특별법에 따르면 PC방, 노래방, 일반 음식점 등 다중이용업소는 의무적으로 한글 및 1개 이상의 외국어를 병기한 피난안내도를 비치해야 한다. PC방의 경우 모니터 상에 피난 안내도를 노출할 수 있다. 다만 해당 법령은 소급적용 되지 않아 2015년 법 개정 이전에 영업신고를 한 업소는 한글판만 비치해도 법에 저촉되지 않는다.
안암동 모 PC방 벽에 부착된 피난 안내도. [사진 = 문혜령 인턴기자]
다르게 번역된 피난 안내도를 사용한 업소들은 "몰랐다"는 반응이다. 다른 내용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것. 인터넷을 통해 다운로드 받은 피난 안내도를 그대로 인쇄, 부착하기 때문이다. 한국소방안전협회 및 일부 소방본부, 피난안내도 제작 업체에서 제공하는 표준 피난 안내도에도 이같은 영문판은 그대로 올라와 있다. 한 PC방 관계자는 "인터넷에서 피난 안내도를 내려 받았는데 어떤 경로로 구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시민들은 대부분 외국인들에게만 무리한 화재 대처 요령을 지시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직장인 김 모씨(25)는 "외국인 친구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알려주니 놀란 눈치였다"며 "한국어에 서툰 외국인들이 직접 화재신고를 하는 건 어려운 일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대학생 송 모씨(22)는 "재난 발생시 대피가 어려운 PC방과 노래방 등에서 주요 내용이 다르게 번역된 대피요령을 안내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며 "정확한 안내도를 배치하고 외국인들을 위해 비상구 등도 시각적으로 더 명확히 표시하면 좋겠다"고 의견을 냈다.
국내에 체류하는 외국인은 200만 1828명(2016년 6월 기준)으로, 전체 인구의 3.9%에 달한다.
[디지털뉴스국 문혜령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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