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빗자루로 거칠고 아름답게 쓸어낸 제주 풍광…민중미술 작가 강요배 개인전 `상(象)을 찾아서`
입력 2018-05-29 16:04 
강요배 '수직 · 수평면 풍경'(130×161.7cm)

어느날 제주시 한림읍 귀덕리에 자리잡은 화가 강요배(66) 작업실 '귀덕화사(歸德畵舍)'에 까만 길냥이가 놀러왔다. 먹을 것을 주자 덩치가 더 큰 길냥이까지 찾아왔다. 그러자 어느새 정이 든 까만 길냥이의 발걸음이 뚝 끊겼다. 이제 기다려도 오지 않는 길냥이를 그림으로 남겼다. 치켜뜬 고양이 눈빛이 원망인지 그리움인지 알 수가 없다.
적적한 화가의 마음을 사로잡은 으악새, 눈 밭의 까마귀, 겨울에 찾아오는 한조(寒鳥), 쪼그라들었지만 탐스러운 감이 달린 동시(冬枾), 귤 옆에서 봄잠 자는 고양이 등 제주살이의 벗을 화폭에 풀어놨다. 빨간 열매가 달린 먼나무와 수돗가에 쌓인 눈, 뜰에 핀 백일홍, 막걸리 안주로 즐기는 오이와 두부 그림도 소소한 삶의 편린이다.
고구려 고분 벽화처럼 오랫동안 남기고 싶은 기억인 탓일가. 아크릴 물감을 사용해 거칠고 메마른 질감으로 대상의 특징만 압축해놨다. 기름기 없이 깡마른 화가의 체구와 담백한 성격과 닮았다.
최근 서울 학고재 갤러리에서 만난 강 화백은 "그림다운 그림이란 일상의 사건과 풍경을 압축한 상(象·이미지)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자연을 관찰한 후 작업실에서 와서 마음 속에 남은 강렬한 기억을 끄집어냅니다. 그림 본연의 모습은 압축적이고 상징적인 이미지에요. 표피에 말려들어 복사기처럼 구질구질하게 배경을 다 그릴 필요는 없지요."
강요배 작가
그래서 이번 개인전 주제가 '상(象)을 찾아서'다. 1992년 귀향한 제주도 풍광을 마음으로 여과해 추상화 30여점으로 펼쳐놓았다.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대상을 도장 찍듯이 마음에 새기는 인상(印象), 마음 속에 떠오르는 이미지 심상(心象), 사물의 특성을 추출하는 추상(抽象) 단계를 차례로 밟는다. 이 과정을 거친 그림이 우리 삶의 정수와 맞닿아 있다고 믿는다.
"향수를 추출하듯이 핵심만 뽑아내는 작품이 그림이에요. 훈련이 많이 되야 뽑아낼 수 있죠. 세상이 뒤집어져도 내 마음을 끄집어낼 겁니다."
그가 압축한 제주 자연은 거칠면서도 아름답다. 투박하고 성근 제주 땅과 돌, 풀을 그리기 위해 빗자루, 말린 칡뿌리, 서너 겹 접은 종이 붓을 사용했다. 화업 50여년 내공 탓에 여러 벗 덧칠해도 질감이 두껍지 않다. 강 화백은 "제품화된 붓은 터치가 너무 얌전해 거친 재료를 쓴다"며 "내 그림에서 질감이 가장 중요하다. 이중섭, 박수근 선생처럼"이라고 강조했다.
강요배 '파란 구름'(112×162.3cm)
지난해 서리가 내리는 24절기 상강(霜降) 무렵 석양을 그린 작품에서는 벌겋게 타오르는 구름을 빗자루로 쓱쓱 쓸어냈다. 45도로 쳐다본 하늘 허공에 바람이 가는 느낌을 표현했다고 한다.
지난 겨울 제주도에 눈이 많이 내린 탓에 설경이 많다. '보라 보라 보라'는 눈과 물보라가 뒤섞인 바다 풍경을 그렸다. 눈을 못 뜰 정도로 폭설이 내린 날 해수욕장에서 바라본 바다를 화폭에 추출했다. '파란 구름'은 바람인지 나무인지 애매한 경계를 풀어놓았다. 작가는 "바람과 팽나무가 서로를 만드는 느낌을 표현했다"고 설명했다. '항산'은 한라산 정상 설경을 500호 캔버스에 담은 대작이다. 눈보라가 휘날린 다음날 맑게 갠 산의 모습을 그렸다.
가슴이 답답할 때는 물이 솟아오르는 작품 '치솟음'을 그렸다. 답답했던게 시원하게 뚫리는 기분이었다. 그는 고통스러웠던 4·3제주 항쟁 역사화 50여점을 완성한 후 심신이 지쳐 고향으로 돌아갔다. 자연과 대화하고 호흡하면서 마음을 치유했다.
강요배 '상강'(182×259cm)
강 화백은 "이제 그림을 많이 그렸으니까 막걸리를 많이 마셔야겠다. 사실 작업할 때 긴장 풀려고 마셨으니 많이 마신건데···. 1만원에 7병 살 수 있는 막걸리에 산나물 뜯어 고추장에 찍어 먹으면서 그렇게 살면 되지"라며 껄껄 웃었다.
이번 전시는 6월 17일까지 이어지며, 역사화를 모은 2부 전시 '메멘토, 동백'이 6월 22일부터 7월 15일까지 열린다.
[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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