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이마·구레나룻 단정해야 신사…이발사만이 해줄수 있죠"
입력 2018-04-13 16:56 
새이용원에서 20년 째 영업 중인 여성 최초 이발사 이덕훈 씨(84) [사진 = 신경희 인턴기자]

뒷머리부터 콧수염까지 쉐이빙폼을 바른다.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한 올 한 올 정성스럽게 머리를 다듬기 시작한다. 이덕훈 씨(84)는 60년째 남성들의 머리를 손질하는 '명랑 이발사'다. 항상 쾌활하게 손님을 맞이하고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정정한 기운을 보여줘 동네 사람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그는 1958년 이용사 면허시험에서 여성 최초로 합격했다. 고 김두한 씨와 고 정주영 회장 이발까지 담당했다고 하니 역사의 산증인이 아닐 수 없다. "언론 인터뷰를 몇 번 했다. 하지만 여자 기자가 부탁한 건 얼마 안 돼서"라며 흔쾌히 취재를 허락했다. 지난 12일 서울 성북구 성북동 '새이용원'에서 그를 만났다. 4평 반 이발소는 다섯 명이면 가득 찰 크기였고 퀴퀴한 향이 낡은 물건들과 묘하게 조화를 이뤘다.
새이용원 전경 [사진 = 신경희 인턴기자]
―이발을 처음 접한 건 언제였나.
▷내가 7살 때 가족들 모두가 북만주로 건너갔었어. 아버지가 최전방 부대 이발 담당관으로 차출됐기 때문이지. 혹시 마루타 부대라고 들어봤나. 딱 그 부대였지. 거기서 11살까지 살다가 8·15 광복으로 서울로 돌아왔어. 그 때 왕십리 부근으로 자리 잡았지. 그러다 또 6·25가 터져서 고향 홍성에 잠깐 내려가 있다가 수복된 후 상경해 60년째 이발하는 중이야. 감도 안 잡히는 세월이지? (웃음)
―당시엔 아들이 가업을 물려받지 않았나.
▷난 맏아들이나 다름없었어. 5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나서 동생들 뒷바라지에 평생을 바쳤지. 19살 때 아버지가 다니던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부) 감사원 이발소에서 일을 도왔어. 물도 나르고 머리칼도 치우고. 그러다 1958년 이용사 면허시험에 붙었지. 총 69명 중 31명이 합격했는데 그 중 유일한 여자였어. 그래서 최초의 여성 이발사가 됐지.
―최초 여성 이발사로서 삶이 순탄했나.
▷순탄했다면 거짓말이지. 지금처럼 미장원이 많았던 것도 아니고 이발소에는 대부분 남자들이었지. 하지만 그땐 그런거 신경 쓸 겨를조차 없었어. 아들 넷 건사하고 동생들까지 보살피려니 닥치는대로 일했지. 남편 사업부도 맞은 후엔 시부모까지 모시고 살았어. 지금 같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지. 그런데도 내가 살아남은 건 오직 '실력' 때문이야. 손님들한테 인정받는 낙으로 버틴거지. 나처럼 이발 꼼꼼하게 하는 사람도 없을 거야.
이발을 시작한 이덕훈 이발사 [사진 = 신경희 인턴기자]
한창 인터뷰를 진행하던 중 손님이 들어왔다. 50대 중년 남성으로 단골이라 했다. 큰 목소리로 "어서 오슈!" 외친 이 씨는 재빠르게 흰색 가운을 걸쳤다. 갑옷을 걸친 장군의 호기가 저럴까.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손님의 목과 상체에 수건을 두른다. 쉐이빙폼을 뒷머리 아래 부분부터 바르기 시작한다. 짤막한 스틸 면도칼로 목덜미 부분을 다듬고 머리칼 숱을 친다.
갑자기 의자가 '툭!'하고 눕혀진다. 요즘 미용실에서 볼 수 없는 직관적인 기능에 웃음이 터져버렸다. 이발사는 "우습냐? 요즘 것들은 이런 거 본 적 없지" 하며 농담을 던진다.
―전통 이발을 처음 본다. 얼굴 면도 서비스도 포함되는지 몰랐다.
▷이게 왜 서비스야? 당연한거지. 얼굴 털이 얼마나 중요한데. 이마·인중·구레나룻까지 단정해야 진짜 신사야. 하긴 남자들은 목욕탕에서 아직 해주긴 하는데 여자들은 거의 본 적 없을거다.
면도가 끝나면 개수대로 이동한다. 이발사는 샴푸를 묻히고 수도꼭지를 틀어 투박하게 머리를 감긴다. 마치 아들 등목해주는 어머니처럼 정겹다. 손님은 익숙한 듯 등을 굽히고 비누칠을 돕는다. 푹신한 소파에 누워 간지러운 두피 마사지를 받으며 자랐던 기자로서는 생소하기만 하다. 샴푸를 마치고 다시 자리로 이동해 머리를 말린다. 스틸 재질 드라이기가 웅장한 소리를 내며 이발소 안을 가득채운다.
15년 된 철제 드라이기와 친정 아버지께 물려받은 커트(일명 바리깡) 기계. [사진 = 신경희 인턴기자]
―드라이기가 오래돼 보인다.
▷이건 15년밖에 안 됐어. 저기 보이는 커트(일명 바리깡) 기계는 우리 아버지가 쓰시다 물려주신 건데 100년도 넘은 거야. 지금은 쓸 수 없어서 저렇게 명패처럼 걸어놔. 가끔 보면서 떠나간 가족들 생각해.
―60년 이발 인생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손님은.
▷모든 손님이 기억에 남아. 가게에 처음 들어오는 눈빛부터 말투·생김새까지. 머리를 잘 다듬어주려면 그 사람을 알아야해. 그래서 알게 모르게 성격까지 파악하려고 애써. 특히 기억에 남는 손님이 있다면 고 정주영 현대 회장과 김두한 씨지. 정주영 회장이 남산 외인아파트 살았을적 근처 이발소에 취직했는데, 집에 가서 이발을 해드렸지. 다른 이발사가 오면 "성북동 아줌마 불러~" 그러셨다고 해. 특별히 주문하시는건 없었지. 김두한 씨는 거구였지. 큰 지프차를 타고 다녔는데 그게 가게 앞에서면 땅이 울릴 정도로 엔진 소리가 컸어. 두 분 다 워낙 유명하고 기력도 대단했지.
매일 닦아 같은 자리에 정리해두는 이발 도구들 [사진 = 신경희 인턴기자]
―이발 철학이 있다면.
▷이발은 수학 문제처럼 대해야 해. 내가 비록 초등학교까지 밖에 안나왔지만 수학을 좋아했어. 세모·네모·마름모··· 도형보고 맞추는 걸 잘했지. 이발도 같아. 손님 두피와 두상, 머리카락을 보고 제 각기 다른 디자인을 해야 해. 다만 한가지 원칙을 꼭 지켜야 하지. 바로 '남자 머리는 어느 방면에서 빗어도 곱게 빗어지도록' 깎고 수염은 피부로부터 0.1mm 남게 다듬어야 한다는 점이야. 머리카락은 한 사람당 평균적으로 150만 개가 있고 한 달에 1cm 열흘에 1mm 자란다는 사실도 잊으면 안돼.
―이발소가 많이 사라졌다. 어떻게 생각하나.
▷아쉽지만 받아들여야지. 요새 뉴스에서 젊은 사람들이 많이 힘들다고 하더라고. 난 이런 것도 다 알고 있어(웃음).이발은 행복한 직업이지만 그만큼 힘들기도 해. 한 명 당 5000원씩 받으며 일하는데 그 손님들마저 다 미용실 가는 세상이야. 누가 하려고 하겠어. 그저 명 다할 때까지 이발소 열고 최선을 다할 생각이야.
거울에 비치는 새이용원의 낡은 사물들 [사진 = 신경희 인턴기자]
새이용원의 사물은 정신적 지주 이덕훈 할머니를 따른다. 손때 남은 거울 빛바랜 수건 정갈한 도구들까지. 전쟁에 나가는 특공대처럼 우직하지만 동시에 따뜻하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가는 기자에게 할머니는 낡은 목재 서랍 속 홍삼 캔디 3알을 쥐여준다. "이거 좋아하냐?" 한 마디를 덧붙이며. 인간에 대한 연민과 애정이 그가 지난한 삶을 버텨낸 원동력이 아닐까.
[디지털뉴스국 신경희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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