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쇼팽 콩쿠르 우승자가 아니라 `조성진`으로 기억되고 싶어요."
입력 2018-01-04 15:00  | 수정 2018-01-04 15:17

투명하고 맑은 음색이 수채 물감처럼 톡톡 번졌다. 마치 수면위의 파문처럼 잔잔하지만 여운이 깊다. 조성진이 연주하는 드뷔시의 '황폐한 사원에 걸린 달'은 특유의 맑고 투명하면서도 화려한 음감이 돋보였다. 이어 베토벤에 피아노 소나타 8번 비창 3악장. 특유의 가벼운 터치에 힘이 실리며 속도감이 붙는다. 소란스럽지 않으면서도 격정적인 베토벤이었다. 지휘자 사이먼 래틀이 '건반 위의 시인'이라 부른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또 다른 면모였다.
4일 예술의전당 IBK 챔버홀이 오전부터 기자들과 400여명의 팬들로 가득찼다. 7일 부산을 시작으로 서울, 전주, 대전으로 이어지는 조성진의 피아노 리사이틀의 쇼케이스를 위해서다. 쇼팽 콩쿠르 이후 서울과 통영, 대구에서 각각 공연이 있었지만 전국 주요 도시 순회공연을 갖는 것은 이번이 처음. 이미 전국 9700여 석이 예매 오픈 수분 만에 매진됐다.
"어릴때 꿈이 피아니스트였어요. 그런데 저를 소개할 때 '안녕하세요, 피아니스트 조성진입니다'라고 말하는 게 항상 부끄러웠어요. 그런데 이제는 피아니스트가 된 것 같아요."
스스로를 '피아니스트'라 소개할 수 있게 됐다는 조성진의 말은 그가 걸어온 길을 보면 수긍이 간다. 올해 개띠로 이제 막 스물네 살을 맞이한 조성진은 2015년 쇼팽콩쿠르 우승이후 도이치 그라모폰 레이블과의 음반 계약, 카네기홀 데뷔, 베를린 필과의 협연등 굵직한 성과들을 이뤄냈다. 그동안 바쁜 투어 일정으로 한국에서 만나기 어려웠지만 올해는 리사이틀을 비롯해 정경화와 듀오무대, 산타 체칠리아 오케스트라와 협연무대, 12월 도이치 그라모폰 120주년 갈라 콘서트 등으로 한국 관객을 쉼 없이 만난다. 그 포문을 여는 전국 투어 프로그램의 1부는 베토벤 소나타. 8번과 30번으로 베토벤 초기와 후기 작품을 나란히 선보인다. 이어 드뷔시 수록곡 중 영상 2집과 쇼팽 피아노 소나타 3번을 선보인다.
-이번 첫 전국 리사이틀을 베토벤, 드비쉬, 쇼팽 세 작곡가로 구성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
▶베토벤은 가장 존경하는 작곡가입니다. 예상 밖의 화성이나 음악적 아이디어를 끊임없이 발견하게 돼요. 무엇보다 그의 초기작품과 후기작품은 같은 사람이 썼다는 걸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달라요. '운명교향곡'처럼 운명에 맞서는 베토벤도 있지만 제가 연주할 30번처럼 운명을 받아들이는 베토벤도 있죠. 드뷔시는 제가 파리에서 배우고 느낀 것을 잘 담아낼 수 있는 곡입니다. 또 쇼팽 피아노 소나타 3번과도 잘 어울리고요.

-쇼팽 콩쿠르의 첫 한국인 우승자로 이름을 알렸는데.
▶언젠가는 쇼팽 콩쿠르 우승자 타이틀에서 벗어나고 싶어요. '조성진의 음악'으로 기억에 남고 싶습니다. 그걸 위해서 최근에 레퍼토리를 더 넓혀가려 하고 있어요. 앞으로 몇 십년동안 피아니스트로 활동할 것 같은데 그 동안 쇼팽만 치기에는 아깝잖아요. 세상에는 좋은 곡들이 너무 많은데.
-최근 파리에서 베를린으로 이사한 이유는, 새로운 생활은 어떤지?
▶8월에 이사를 했는데 투어를 많이 다니느라 베를린에 머문 시간은 한 달 남짓입니다. 현재까지는 너무 좋아요. 사실 요즘 젊은 음악가들 사이에 베를린은 트렌드에요. 뛰어난 음악가, 훌륭한 오케스트라가 너무 많아 음악인에게 너무 행복한 도시죠. 해가 빨리지는 점과 날씨가 안 좋은 거 빼고는요.(웃음)
-집에서 주로 연습을 한다고 들었는데, 연습을 얼마나 하시나요?
▶하루에 4시간만 하려고 노력합니다. 4시간 이상을 하면 어깨가 아프거나 손이 아프더라고요.
-공연을 앞두면 긴장감이 클텐데, 스트레스를 푸는 특별한 방법이 있나요?
▶애초 성격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편이 아니에요. 친구들 만나서 밥 먹고 푹 자면 풀립니다. 음악은 클래식을 주로 듣는데 가요로는 김광석 선생님의 곡을 좋아해서 가끔 들어요.
-새해 가장 이루고 싶은 소망은 무엇인가요?
▶작년 31일은 베를린에서 가족과 보냈어요. 자정이 되서 다 같이 새해 소원을 비는데 소원이 없는 거예요. 그저 앞으로 연주를 건강하게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다만 장기적으로 선입견을 깨나가고 싶습니다. 저는 인종차별은 당해본적이 없어요. 윗세대 선생님들이 열심히 해주신 덕분이죠. 하지만 여전히 동양인 연주자에 대한 막연한 선입견이 있어요. 그걸 깨고 싶어요. 제가 기성세대가 됐을 때 젊은 세대들이 보다 자유롭게 연주활동을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특별한 소원이 없다면 반대로 걱정거리는 없나요?
▶당장은 없어요. 지금은 쇼팽 콩쿠르 우승한지 얼마 안 됐고, 젊은 연주자고, 무엇보다 2020년 말까지 일정이 다 잡혀있어서요. 하지만 앞으로 삼사십 대가 됐을 때 다가 올 일들을 알기 때문에 조금씩 생각하고 있습니다. 30대가 되면 저보다 더 젊은 연주자도 많이 나올 테고, 거장도 아니고 젊은 연주자도 아닌 애매한 나이인데 그 때 제가 어떤 연주를 할지요.
-30대가 되면 브람스를 연주하고 싶다고 했는데.
▶브람스를 너무 좋아하는데 연주를 많이 못해봤어요. 30대라고 말한 이유는 조금 더 제 것으로 만든 다음에 연주하고 싶은 마음때문이에요. 또 고등학교 때는 제가 통통했는데 지금 살이 좀 빠졌어요. 체중하고 소리가 연관이 있는 것 같아요. 브람스를 치려면 조금 더 몸무게가 나가야 할 것 같아서 30대까지 살을 더 찌울 것 같습니다. 독일에서 맥주도 많이 마시고 있어요.
[김연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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