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단독] 새 정부 공정위 전방위 압박에…기업들 "돌다리도 두드리고 건너자" 로펌들에 SOS
입력 2017-12-18 15:35  | 수정 2017-12-18 15:37

중견 유통업체 A사는 지난 10월 한 대형 로펌을 다급히 찾았다. 연내 구매 사업부를 분사한 뒤 회사 일감을 맡기려 했던 계획에 법률문제가 없는지 검토하기 위해서였다. 다른 기업들처럼 분사한 회사의 대주주를 창업주 친인척들로 구성하려 한 것이 쟁점이었다. 로펌은 즉각 "'통행세'가 발생한다"고 진단했다. 통행세란 기업 간 불필요한 거래 단계를 추가해 그 과정에서 얻는 부당이익으로 공정거래법 위반행위에 해당한다.. 예전 같았으면 강행했을 법도 하지만 A사는 로펌과 상의 끝에 다른 방안을 강구하기로 했다.
비슷한 시기 중견 제약업체 B사도 또다른 대형 로펌에 자문을 의뢰했다. 그동안 진행해 온 대리점 사업 중 공정거래법에 저촉되는 사안이 있는지 미리 확인하겠다는 목적이었다. 로펌은 한 달 반가량 회사를 다각도로 진단하며 조언했다. 당시 경영진에선 "신사업을 추진하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비용을 써야 할 필요가 있느냐"는 불만도 나왔다. 그럼에도 창업주 2세인 최고경영자(CEO)는 "이럴 때 일수록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야 한다"며 컨설팅을 강행했다.
지난 6월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 취임 이후 기업들이 로펌에 SOS를 요청하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 과거와 달라진 공정거래위원회의 정책 기조에 맞춰 수년 전부터 자체 컴플라이언스(준법경영) 조직을 갖춰온 대기업뿐 아니라, 중견·중소기업들도 '법률 리스크 관리'에 신경쓰기 시작한 것이다. 오금석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52·사법연수원 18기)는 "그동안 중견·중소기업들은 공정거래법을 잘 몰라 의도치 않게 위반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최근 공정거래에 관한 규제가 대폭 강화되면서 관련 자문을 요청하는 기업들이 늘고 있다"고 전했다.
실제 김 위원장은 지난 14일 송년 기자간담회에서 "공정위가 해결해야 할 과제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재벌 개혁'과 '갑질 근절'"이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공정위는 재벌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그동안 대기업 조사를 전담해온 '기업집단과'를 '기업집단국'으로 확대 개편했다. 그 아래에는 기업집단정책과, 지주회사과, 공시점검과, 내부거래감시과, 부당지원감시과 등이 있다. 동시에 갑질 근절을 위해 유통업법, 대리점법, 가맹사업법의 전속고발제를 폐지하기로 했다. 담합·보복 등에 적용되는 징벌적 손해배상액 역시 현행 3배에서 최대 10배로 올리는 방안을 검토중이다.
이처럼 공정위의 압박이 늘면서 국내 주요 로펌들도 관련 자문 서비스 강화에 진력을 쏟고 있다. 법무법인 태평양은 최근 공정위 업무를 담당했던 공정거래팀을 주축으로 기업소송팀, 형사팀, 디지털포렌식팀으로 구성된 '공정거래 위험진단 및 종합지원단(이하 공진단)'을 신설했다. 공정거래법과 관련한 '원스톱 솔루션'을 기업들에게 제공하겠다는 복안이다. 공정거래팀과 디지털포렌식팀이 사전에 진단하고 기업소송팀과 형사팀이 적발 뒤 사후 조치를 맡는 역할을 한다.
법무법인 세종은 '탄탄한 맨파워'를 앞세워 자문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수년 전부터 꾸준히 확대해온 공정거래팀에는 전체 인력의 10% 이상인 60여명이 투입돼 있다. 이 가운데 50명 정도가 공정거래 업무만 전담하는 베테랑이다. 이러한 강점 덕분에 최근 진행된 입찰 담합 사건에서 삼성물산, 현대건설, 대우건설 등 국내 주요 건설업체들을 모두 대리하기도 했다.
법무법인 광장은 '특화 서비스'로 기업들을 공략하고 있다. 대표적인 서비스가 법률 위반 소지를 사전에 점검할 수 있는 모니터링 시스템 '컴피티션 컴플라이언스 프로젝트'다. 이를 위해 지난 4월 공정위 기업집단과장 출신 인사를 영입했다. 또 국내 로펌 중 유일하게 팀내 경제자문·분석 조직을 운영 중이다. 앞으로 늘어날 공정거래 관련 손해배상 소송에 대비하겠단 것이다.
김·장 법률사무소를 비롯한 율촌, 화우, 지평 등 주요 로펌들도 기존에 쌓아온 노하우를 바탕으로 기업들에게 전문화된 공정거래 자문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방침이다. 한 로펌 관계자는 "김상조 위원장 취임 이후 사실상 '공정거래 자문'이라는 새로운 시장이 열린 것이어서 로펌별로 차별화된 서비스를 마련하는 데 고심 중인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공정거래 자문 서비스를 통한 '사전 예방' 효과를 강조하고 있다. 예전엔 문제가 돼도 기업들 부담이 크지 않았다. 자금 여력이 되고 기업 이미지가 중요한 일부 대기업을 제외하면 굳이 비용을 들여 이러한 법률 자문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공정위의 처벌 강도가 갈수록 세지고 있어 중견·중소기업들도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게 됐다. 예전에 비해 몇 배에 달하는 페널티를 부담하기 힘든 상황이다. 심지어 담당 직원들의 형사처벌 가능성도 커졌다.
대기업 '갑질'을 근본적으로 해소하려면 기업들의 인식 개선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공정위 과장 출신인 박주영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52·외국변호사)는 "경영진과 직원들의 인식이 변하지 않으면 해결될 수 없다"며 "대기업은 상대방을 '을'이 아닌 '파트너'로 봐야 하고, 경영진은 '갑질'로 성과를 내는 직원들에 대해 평가 체계를 바꿔야 한다"고 조언했다.
[송광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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