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청와대에 다시 걸린 전혁림 `통영항`
입력 2017-11-09 11:19 
전혁림 통영항

2005년 경기도 용인시 이영미술관에서 열린 전혁림 화백(1915~2010)의 전시 '90, 아직은 젊다'. 전 화백이 구순의 열정을 쏟은 신작 '통영항'이 시야를 압도했다. 높이 3m, 폭 6m 코발트 블루 다도해에서 삶이 오방색으로 빛났다. 배와 섬, 항구, 건물은 정겨운 이웃이 되어 오밀조밀 바다를 메우고 있었다.
TV를 통해 이 그림을 본 고 노무현 전 대통령(1946~2009)이 연락도 없이 전시장을 찾았다. 그는 전 화백의 손을 잡고 "젊은 날,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통영 달아공원을 찾아 다도해를 내려다보며 마음을 위안받았다"고 고백했다. 그림을 청와대에 걸고 싶다는 부탁에 전 화백은 4개월간 작업에 매진해 또 하나의 '통영항'을 완성했다. 높이 2.8m, 폭 7m 대작으로 2006년 청와대 인왕실 벽에 걸렸다. 한산섬과 미륵섬 등을 어미닭처럼 품고 있는 남해안 다도해 풍경을 담은 수작이었다. 하지만 2009년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하고 2010년 전 화백이 세상을 떠나면서 작품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자취를 감췄던 이 작품이 노 전 대통령의 지기인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 주인이 되면서 지난 9월 인왕실로 돌아왔다.
노 전 대통령은 왜 전 화백의 그림에 끌렸을까. 두 사람은 아웃사이더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부산의 인권 변호사 출신으로 대통령까지 올랐지만 노 전 대통령은 주류 정치의 배척을 받았다.
전 화백 역시 2002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작가상'까지 수상했지만 평생 학연과 지연 중심의 중앙 화단과 거리를 좁히지 않았다. 1933년 통영수산전문학교를 졸업한 그는 독학으로 그림을 그렸다. 고향인 통영과 부산에서만 작업하면서 독자적인 조형감각을 연마했다. 늘 "자연이 가장 훌륭한 선생"이라고 강조했던 작가는 사랑하는 남도와 바다 등 자연의 모습을 풍성한 색채감으로 담아내는데 혼신을 쏟았다. 활어처럼 펄떡 뛰는 코발트 블루와 역동적인 오방색을 화폭에 펼쳐 '바다의 화가', '색채의 마술사'로 불린다. 서구의 추상사조나 일본풍의 단색화 열풍에 휩쓸리기를 거부하며 한국화가로서 정체성을 고집스럽게 지켰다.
전혁림 누드
주류에 편승하지 못한 탓에 예순 살이 넘어서야 본격적인 조명을 받았다. 구상과 추상을 넘나드는 한국적 색면추상의 선구자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했다는 호평이 쏟아졌다. "그림은 국적이 뚜렷해야 한다. 내 그림에는 한국이 나타나 있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해온 작가의 소신이 빛이 발하는 순간이었다.
일제 식민시대와 한국전쟁 등 격동기를 거쳤으나 지나치게 아름다운 그의 화폭이 서울 강남 K현대미술관에서 펼쳐지고 있다. 회화와 조각 100여점을 모은 특별기획전 '더 블루 시 인 더 블루 하우스(The Blue Sea In The Blue House): 님을 위한 바다'에서다.
전시장에서 청와대에 걸린 '통영항'의 모티브가 된 2005년작 '통영항'을 감상할 수 있다. 그 해 작업한 1000호 대작 '한려수도의 추상적 풍경', '기둥 사이로 보이는 한려수도' 역시 바다에 대한 애정이 넘친다. 추상적인 화면 구성에도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자연의 구상적 이미지가 부드럽게 섞여 있다. 높이 1.2m, 폭 3.4m 그림 12점으로 구성된 '코리아 판타지'(1989) 연작도 푸른 바다를 닮은 작가의 내면 에너지를 표출한다.
높이 3.5m, 지름 2m에 달하는 도기 위에 거대한 붓으로 그린 '통영 항아리'(2005), 엽서 크기 캔버스에 그려진 '누드'(2005) 연작은 작가의 다양한 예술 세계를 보여준다. "나는 작업을 통해서 죽음을 극복하고 있다. 내 작품은 생의 노래"라는 작가의 말을 되새기면서 전시장을 돌와봤다.
김이환·신영숙 이영미술관장 부부의 딸인 김연진 K현대미술관장은 "오롯이 지방 화단에 머물며 한국 추상미술의 스펙트럼을 넓혀간 이단아 전혁림의 예술세계를 재조명하는 전시"라며 "누구나 아름답다고 느끼는 보편성을 가진 작가"라고 설명했다. 전시는 내년 2월 11일까지.
[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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