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교보문고 `심야책방` 밤샘 독서 해보니
입력 2017-09-24 13:19  | 수정 2017-09-24 18:58

지난 22일 금요일 밤 11시께 서울 교보문고 광화문점. 평일 영업시간(오전 9시 30분~ 밤 10시)을 훌쩍 넘긴 시간이지만 8595㎡(2600평)에 이르는 서점 내부에 독서 삼매경에 빠진 시민들이 제법 눈에 띄었다. 이날은 이튿날 새벽 6시까지 교보문고 '심야책방'이 열리는 날. 대산 신용호 선생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한 '밤샘 독서' 행사다.
카우리나무로 만든 거대한 100인 테이블은 이미 만석에 가까웠다. 사전에 신청한 시민들과 당일 서점을 들렀다 즉흥적으로 야간 독서를 감행한 이들인데, 30분 후 베스트셀러 '언어의 온도' '말의 품격'을 쓴 이기주 작가의 북토크가 열릴 예정이었다. 1시간가량 북토크가 이뤄진 다음 밤샘 독서가 시작되는 식이다. 먼저 도착한 이 작가를 만나 대화를 나눴다.
"어떻게 참석하게 됐어요?"(기자) "작가로서 독자와의 스킨십을 중시해요. 심야시간인 만큼 깊은 차원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리라 봤어요. 자발적인 고립이랄까요. 하루하루 페이지를 넘기면서 사는 고된 삶이 잖아요, 그 틈 속에서 각자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함께 가져봤으면 했어요.(웃음)"
강연 때마다 좋은 글쓰기에 대한 조언을 많이 질문받는다고 했다. 이 작가 역시 "늘 지니고 있는 숙제"란다. "비법은 없고 방법만 있다고 봐요. 글쓰기에 첩경은 없죠. 여전히 모른다고 생각하며 경건함과 두려움을 머금고 부단히, 겸손하게 써야 지 않을까 해요."
"어느 시간대에 책을 읽느냐"고 물으니 "장르적 배분을 하고 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아침에는 맑은 정신으로 시나 에세이를 읽는다고 했다. 야심한 밤에는 소설이나 깊이 몰두해야 하는 저서들을 본단다. 이를테면, 칼 세이건의 책처럼 인내심을 요하는 호흡긴 저작들. 좋아하는 책과 저자를 독자들에게 추천해달라 했더니 세 명의 작가를 그는 거론했다. "음, 문장으로 치면 김훈 작가님의 무게감 있는 문장을 좋아해요. 호흡은 짧은데 그 문장의 하중은 어머어마하시죠. 한강 작가님의 문장은 대단히 아름다우시더군요, 모든 문장이 시적인 것 같고요. 미국의 레이먼드 카보의 짧고 드라이한 문장도 좋아하고요.(웃음)"
11시 30분을 조금 넘긴 시간, 어림잡아 120~30여명이 카우리나무 테이블을 중심으로 모여 앉았다. 이 작가는 북토크 내내 '내파'(內破)라는 용어를 자주 꺼냈다. '스스로를 깨부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독서 이유라는 것이었다. "유명 저자들의 인사이트만 섭렵하는 게 무슨 소용일까요. 중요한 건 그것을 내 식으로 재해석하고 받아들이며 각자의 삶에 대입해보는 행위여야 한다고 봐요. 그렇게 스스로의 내적 반경을 넓혀나가야죠. " 이 작가는 "어떤 글이 좋은 글"이냐는 한 독자의 물음에 "쉽게 써지는 글을 경계하는데, 외려 더디게 고통스럽게 써질 때의 문장들이 밀도와 하중 면에서 마음에 들더라"고 말했다.
북토크가 끝난 새벽 1시 무렵.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임에도 서점 내부로 어림잡아 150여명이 남아 있었다. 저마다 챙겨온 책들을 꺼내 새벽 독서에 여념이 없어 보였다. "몇 시까지 읽을 예정이예요?" 가만히 책을 읽고 있던 여대생 김나연 씨(22)와 최유나 씨(25)에게 다가가 말을 붙였다. "새벽 6시까지, 밤새도록요. (웃음)"
두 학생이 챙겨온 책은 모두 소설이었다. "온 다 리쿠의 소설 '꿀벌과 천둥'을 읽으려고요. 이제 반틈 봤는데 밤새 다 읽고 가는 게 목표예요(웃음)"(김 씨) "저는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를 보려고요, 혹시 읽어보셨나요?"(최 씨) "아니요…."(기자) '필경사 바틀비'는 멜빌의 가장 난해하기로 소문난 걸작. 부끄럽게도 기자는 아직 이 책을 못 읽어봤다.
고개를 돌리니 독서 테이블 저편으로 일가족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이번에도 슬며시 다가갔다. "안 졸리세요?"(기자) "안 그래도 딸내미가 잘 거 대비해 담요도 준비했어요, 걱정 없어요.(웃음)" 임영숙 씨(49)는 "새벽 6시까지 버텨볼 것"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이날 임씨의 남편 정 모씨는 콜슨 화이트 헤드의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를, 중학교 2학년생인 딸 정수 양(14)은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읽었다. 이들의 독서 열기에 고무된 기자도 가방에 넣고 다니던 마사 누스바움의 '시적 정의'를 주섬주섬 꺼내들었지만, 결국엔 피로를 가누지 못한 채 오뚜기인형처럼 꾸벅꾸벅 졸았다.
그런 기자를 제외하고, 새벽 독서 열기는 좀처럼 식을 줄 몰랐다. 2시간이 훌쩍 지난 새벽 3시 무렵에도 100여명이 온전히 자리를 지켰다. 일출이 다가오는 새벽 6시경, 최종적으로 밤샘독서를 완수한 이들은 총 50여명. 임씨 가족은 두어시간 전 자리를 떴으나, 문학소녀 최 씨와 김 씨는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다. "피곤하지만 무척 보람찼어요!"(최 씨) "책은 새벽에 읽어야 제맛이라니까요.(김 씨)" 취업준비생인 김태희 씨(27)는 이렇게 말했다. "취업준비로 많이 지쳐 있었어요. 밤새 독서하며 간만에 힐링했네요.(웃음)" 서점 바깥으로 이제 서서히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토요일 아침이었다.
[김시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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