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기자수첩] 누가 멀쩡한 대한민국을 헬조선으로 만들었나?
입력 2017-07-25 17:05  | 수정 2017-08-01 18:08

지난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벌어진 두 명 학자 사이의 설전으로 며칠 동안 '헬조선'이라는 단어가 온라인을 들썩이게 했다.
이병태 카이스트 IT경영학부 교수가 "이 땅이 헬조선이라고 할 때, 이 땅이 살만한 정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욕할 때 한번이라도 당신의 조부모와 부모를 바라보고 그런 이야기를 해 주기 바랍니다"라는 장문의 글을 페이스북에 올리면서다. 이에 박찬운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5천년 역사 최고 행복 세대의 오만"이라고 응수하면서 논란이 커졌다.
헬조선은 소득 수준에 따라 사람의 가치까지 재단되는 현재의 한국 사회가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시대보다 더 살기 힘들다는 의미로, 조선 앞에 지옥을 뜻하는 영어단어 헬(Hell)을 붙여 만든 신조어다. 처음엔 진보성향의 네티즌들이 모이는 커뮤니티에서 확산되다가 아예 이름을 그대로 한 커뮤니티까지 만들어졌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뒤 맨손으로 시작해 한국 경제를 세계 10위권에 올려놓은 기성세대는 자신들이 만들어 온 한국 사회가 헬조선으로 비하되는 게 달가울 리 없다. 그래서 이병태 교수는 "당신들의 빈정거림과 무지에 화가 난다", "응석 부리고 빈정거릴 시간에 공부하고 너른 세상을 보라"는 등의 거친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가 청년이던 군부독재 시절엔 헬조선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았다는 이유만으로도 '빨갱이'가 돼 남산자락 어딘가로 끌려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또 배고픔이 한으로 남은 기성세대들 상당수는 자식인 지금의 청년층들이 최소한 굶주림을 걱정하지 않도록 해줬다. 청년층이 살고 있는 현재의 한국은 기성세대들이 청년이던 시절보다 더 민주적이고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곳이라는 말이다.
기성세대보다 더 나은 시대를 살고 있는 청년들은 왜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을 헬조선이라고 부를까.
대학원생 A씨(32)는 "상대적 빈곤"을 이유로 지목했다. 그는 "기성세대는 청년일 때 절대적 빈곤 속에서 다 함께 어렵게 살았고, 시간이 지나면서 성장의 과실이 지금보다는 광범위하게 분배됐다"며 "대부분 기성세대가 무난히 밟아온 취업, 연애, 결혼, 출산, 자산형성 등 삶의 단계들이 현재 청년들에겐 무엇 하나도 달성할 가능성이 높지 않다"고 말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 5월 기준 최종 학교를 졸업하거나 중퇴한 뒤 취업하지 못했거나 취업했다가 일을 그만둬 미취업 상태인 청년층(15~29세)이 147만2000명이다. 취업해도 첫 월급이 200만원 미만인 비중은 67.1%에 달한다. 그런데 신한은행이 발표한 '2017년 보통사람 금융생활 보고서-추가 이슈 분석'을 보면 최근 3년 동안 결혼한 사람들의 평균 결혼 비용은 남성이 1억311만원, 여성이 7202만원이다. 상위 32.9%에 속해 월급 200만원을 받아도 부모 도움이 없으면 월급을 한 푼도 안 쓰고 3~4년 동안 모아야 평균 수준의 결혼을 할 수 있다. 국가에서 인정해주는 전문직 자격증을 갖고 기업의 관련 부서에서 일하는 B씨는 "서울 시내의 허름한 아파트라도 장만하려면 한 달에 100만원 정도씩 30년동안 갚아야 한다"며 한숨을 내쉰다.
지금의 청년들에게 취업, 결혼, 출산, 자산형성을 단계별로 척척 이뤄가는 건 드라마 속에나 나올 법한 특별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특별하지 않은 사람들이 모두 패배감에 젖어 살아야 한다면 그 사회는 지옥이 맞을 것이다. 특별하지 못해 힘들다는 청년들을 다그치는 이병태 교수도, 동정하는 박찬운 교수도 모두 한국 사회가 헬조선이 되는 데 일조하고 있는지 모른다. '취업-결혼-출산-내집마련'이라는 삶의 정답을 정해놓고 있기 때문이다.
취업이 좀 늦어져도, 결혼을 하지 않아도, 자식을 낳지 않아도, 몇억원짜리 아파트를 소유하지 못 해도 패배자가 아니다. 한국 사회가 헬조선이라는 오명을 벗으려면 먼저 기성세대가 밟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삶의 단계가 이제는 정답이 아니라는 걸 인정해야 할 것이다.
[디지털뉴스국 한경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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