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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K포커스] ‘영원한 No. 9’ 이병규 은퇴식으로 본 영구결번·레전드의 의미
입력 2017-07-12 07:10 
9일 잠실구장에서 "2017 KBO리그" 한화 이글스와 LG 트윈스 경기를 마친 후 지난 17년 동안 LG 유니폼을 입고 뛴 이병규(9번)의 영구결번식 진행됐다. 이병규가 팬들 앞에서 고별사를 하다 눈물을 참고 있다. 사진=김영구 기자
[매경닷컴 MK스포츠 안준철 기자] 어제 나는 은퇴했었지.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난 눈물 흘렸었지.”
록밴드 시나위의 6집에 수록된 ‘은퇴선언의 도입구는 진한 울림을 전했다. 노래가사처럼 야구선수들의 은퇴식은 뜨거운 눈물이 빠질 수 없는 요소다.
지난 9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이병규(43) 스카이스포츠 해설위원의 은퇴식도 그랬다. 그는 1997년 LG트윈스에서 데뷔해 지난해까지 국내에서는 LG유니폼을 입은 LG의 대표적인 프랜차이즈 스타다. 2007년부터 2009년까지는 일본 주니치 드래건스에서 뛴 기간을 제외하고 KBO리그 통산 성적은 1741경기 6571타수 2043안타 992득점 161홈런 972타점 147도루 526볼넷에 장타율 0.452 및 출루율 0.365로 OPS는 0.817에 달한다. 데뷔하던 해인 1997년 KBO리그 신인왕에 올랐고, 7차례 골든글러브 최다안타 4번 및 타격왕 2회를 경험했다. 올스타전 MVP도 1차례 수상했다.
LG팬들은 그를 레전드라고 부른다. 한 팀에서만 뛰면서, 대기록들을 수립했다. LG의 상징이기도 한 스프라이트 유니폼처럼 이병규도 LG를 대표하는 선수로 굳어졌다. 그는 잠실의 영원한 9번으로 남았다. LG는 그가 프로 데뷔때부터 달았던 등번호 9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 LG에서는 지난 1999년 선발과 마무리를 오가며 LG를 두 차례나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던 김용수의 41번 이후 두 번째 영구결번이다. 우승을 한 차례도 차지하지 못한 선수의 영구결번은 최초다.
어쨌든, 이날 은퇴식은 날씨도 도와준 덕에 무사히 치를 수 있었다. 사실 이날 날씨는 비가 오락가락하며 궂었다. 한화를 상대로 LG가 3-2로 이겼지만, 7회 강우콜드게임이었다. 그런데 20여분 뒤인 이병규 영구결번식 행사 때는 거짓말처럼 비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마치 짜인 각본처럼 준비됐던 은퇴식은 성대하게 마무리됐다. 이병규의 뜨거운 눈물과 함께.
앞서 지난 4월30일 잠실구장에서는 또 한 번의 은퇴식이 열렸다. 오버맨으로 유명한 홍성흔(40)의 은퇴식이었다. 지난시즌까지 두산에서 뛴 홍성흔은 이날 자신이 몸담았던 롯데와의 경기에 맞춰 은퇴식을 치렀다. 양 팀 선수들은 물론, 양 팀 팬들까지 홍성흔의 은퇴식을 축하해줬다.
이처럼 이제 은퇴식과 영구결번은 36년째 맞는 프로야구에서 익숙한 장면이 되어 가고 있다. 지난 2012년 KIA에서 은퇴한 이종범 MBC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의 은퇴식 때는 모든 선수들이 이 위원의 현역시절 등번호인 7번을 달고 뛰었다. 은퇴식에는 해당 선수의 스토리를 녹이기 위해 구단들도 더욱 신경을 쓰고 있다.

◆ 레전드 자격증과도 같은 역대 영구결번
이병규의 영구결번은 KBO리그 역대 14번째다. 그 만큼 영구결번이 아직까지 KBO리그에서 영구결번은 희소한 가치를 가진다. 사실 KBO리그 최초의 영구결번은 안타까운 이유에서였다. KBO 리그 사상 첫 영구 결번은 1986년 세상을 떠난 OB 포수 김영신의 54번이다. 김영신은 1984년 LA 올림픽 국가대표 출신으로 이듬해 OB에 입단했지만, 프로에서 크게 빛을 보지 못했고, 1986년 한강에서 익사체로 발견됐다. 경찰은 급류에 휘말려 변을 당한 것으로 발표했지만, 성적비관으로 인한 자살로 여기는 이들이 많았다. OB는 영 결번 지정으로 그를 애도했다.
이후 1996년을 끝으로 해태에서 일본 주니치로 진출한 선동열의 18번이 영구결번으로 지정됐다. 선수의 명예로 영구결번이 된 최초 사례다. 해태는 선동열이 국내 복귀했을 경우를 대비해 18번을 비워뒀지만, 선동열은 1999시즌 이후 일본에서 은퇴했다. 물론 타이거즈의 영구결번 18번은 위기의 순간도 있었다. 2001년 해태를 인수한 KIA는 2002년 특급 신인 김진우에게 18번을 선물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물론 팬들의 거센 반대에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다음은 앞서 언급한 LG 김용수다. 2000년까지 뛴 김용수는 선수생활을 마치기 전인 1999년 최초의 영구결번식을 가진 선수로 이름을 올렸다. 다만 김용수는 요새 치러지는 거창한 은퇴식을 따로 치르지는 않았다.
지난 2012년 4월26일 광주 무등야구장에서 열린 KIA 타이거즈와 LG 트윈스전 은퇴식에서 아들 이정후와 시구 시타를 하고 있는 이종범. 사진=MK스포츠 DB
이후 영구결번은 은퇴한 지 시간이 지난 선수들의 몫이 됐다. 1996년 은퇴한 불사조 박철순의 21번은 두산이 2002년에, 1997시즌 후 은퇴한 삼성 이만수는 2004년에(22번)에 영구결번으로 지정됐다. 롯데 최동원의 11번은 무려 23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1988년 롯데를 떠나 1990년 삼성에서 은퇴한 최동원은 2011년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야 롯데는 비로소 최동원의 추모식을 열고 영구 결번을 선포했다. 1984년 한국시리즈 4승을 홀로 거두며 팀을 우승으로 이끈 에이스의 등번호는 이제 사직구장에 새겨져 있다.
한화는 2005년 장종훈(35번), 2009년 송진우(21번)·정민철(23번)을 잇따라 영구결번으로 지정해 눈길을 끌었다. 삼성은 2010년 양준혁의 10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 이어 2012년 KIA 이종범의 7번에 이어 2014년 SK 박경완의 26번이 영구결번으로 이어지고 있다. 모두 팀을 우승으로 이끈, 또 프로야구의 역사적인 기록을 남긴 레전드급 선수들이 주인공이었다.

◆ 프랜차이즈 푸대접의 역사, 이젠 변해야 한다
프로야구 최초의 은퇴식은 1989년 OB 윤동균이었다. OB 최초의 주장이었고, 은퇴 뒤에는 감독을 역임하기도 했다. 하지만 성대한 은퇴식과 영구결번 지정이라는 화려함은, 쓸쓸하게 은퇴한 선수한 선수들이라는 그림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지적도 있다. 과거 대부분의 선수들은 제대로 된 은퇴식도 치르지 못하고, 흐르는 시간 속에 잊혀졌다. 은퇴도 대부분, 등 떠밀려 한다는 느낌이 강할 정도였다.
두산베어스 김동주는 2014년 은퇴했지만 은퇴식은 치르지 않았다. 김동주처럼 조용히 은퇴하는 레전드급 선수들도 아직 존재한다. 사진=MK스포츠 DB
1998년부터 2014년까지 두산에서 활약한 김동주는 제대로 된 은퇴식도 치르지 못했다. KBO리그를 대표하는 3루수 중 한 명이었고,1998년 방콕아시안게임, 2000년 시드니올림픽,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2008년 베이징올림픽 국가대표로 참가했던 김동주지만, 기량저하로 1군보다 2군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고, 선수생활을 연장하기 위해 kt 이적도 시도했지만, 결국 유니폼을 벗고야 말았다.
사실, 성대한 은퇴식과 영구결번으로 지정됐지만, 이종범과 이병규의 경우도 등 떠밀려 은퇴했다는 시선이 더 많다. 이종범은 2012시즌을 준비하기 위해 스프링캠프까지 다녀왔지만, 은퇴 권유에 KIA를 떠났다. 이병규도 구단의 리빌딩 정책에 지난 시즌 줄곧 2군에 머물다가, 포스트시즌 진출이 확정된 뒤인 페넌트레이스 마지막 경기에 콜업돼 한 경기를 소화하고, 은퇴를 선언했다.
한 전문가는 아직도 선수를 소모품 다루듯 하며 프랜차이즈 선수가 팀에서 차지하는 상징적 가치를 무시하는 풍토가 한국에는 남아있다”며 나이가 들어서 기량이 떨어지거나 신예 선수를 발굴하면 애물단지로 치부하는 경우가 많다. 팀을 위한 선수의 희생이라 은퇴를 강요하고, 그 결단을 하지 않을 경우 팀을 생각하지 않는 이기적인 선수로 다루는 행태는 변화해야 한다”고 꼬집었다.
레전드, 프랜차이즈라는 거창한 수식어에 걸 맞는 대우도 뒤따라야 한다는 기본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물론 변화의 바람도 있다. 올 시즌을 끝으로 미리 은퇴를 선언한 삼성 이승엽, NC 이호준 등은 구단차원에서 선수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한국 프로야구도 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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