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30년전 그날 넥타이부대의 회고 "김밥 사먹으라 1000원 지폐, 눈물 닦아라 휴지 뿌렸죠"
입력 2017-06-09 11:31  | 수정 2017-06-09 14:36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인 1987년 6월10일. 서울의 명동 일대에는 곳곳에서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4·13호헌' 조치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에 반발한 성난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경찰과 군부의 시위 진압을 피해 학생시위대들은 명동 골목 골목을 이리 저리 뛰어다니며 "군부정권 타도" 구호를 외쳤다.
정신없는 아수라판 와중에 갑자기 '아!' 하는 함성이 거리에 울려 퍼졌다. 국민은행, 외환은행, 서울은행 본점 건물에서 일제히 1000원짜리 지폐와 하얀 휴지가 축포처럼 쏟아져내렸다. 학생들 시위를 지켜보던 은행원 '넥타이부대'들이 집회하느라 배고픈 학생들에게 김밥 사먹고 최류탄에 눈물·콧물 쏟아내는 학생들에게 "눈물·콧물 닦아라"며 던진 지폐와 휴지였다.
당시 국민은행 직원으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시위에 동료들을 이끌고 참여했던 박백수씨(60)는 매일경제와 8일 만나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 역시 주머니에서 천원 지폐를 꺼내 거리에 뿌렸다"며 "그 해 여름은 뜨거웠고 출근이 즐거웠고 '넥타이부대'라 불리는 게 자랑스러웠던 역사의 현장"이라고 회고했다.
그는 국민은행에서 수해전 퇴직한 후 현재 국민은행 동우회에서 설립한 (주)국민TS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1987년 6월 박씨는 국민은행 명동본점에서 근무하던 입행 10년차 샐러리맨이었다. 상고 출신으로 안정적 직장에 다니며 주위 부러움을 사던 그였지만 억압적 사회분위기와 직장 분위기에 회의를 느낄 때 였다. 그는 "권력을 쥔 군부세력이 사회를 좌지우지했듯 당시 직장에서도 노조자율성 등이 엄격히 금지된 상황에서 차라리 시골에 내려가 농사나 지어야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던 시기였다"고 말했다.

6월항쟁이 한국 민주주 분수령이 된 것처럼 매너리즘에 빠져 있던 박씨 삶도 그 해 6월이 '터닝포인트'가 됐다. 회사 눈치만 보이던 노조 간부 임기를 마치고 실적 좋은 지사로 발령받기만을 기다리던 그는 학생들 집회가 시내로 진출해오는 것을 목격하면서 뭔가 꿈틀거리는 기운을 느꼈다고 했다.
그는 "시위 시작 이튿날부터 점심시간때 명동일대는 시위하는 학생들 숫자 못지않게 넥타이를 맨 직장인들 숫자가 불어났다"며 "누가 시킨 것도 아니지만 모두가 하나같이 뭐라도 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거리로 뛰쳐나갔다"고 말했다. 박씨는 점심 먹으러 나간 후 오후 일과를 제치고 집회에 참여하기도 했다.
박씨는 "최루가스와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셔츠를 입고 사무실에 돌아와도 뭐라고 탓하는 관리자도 없었다"며 "경영진도 암묵적으로 직원들 참여를 지지하는 분위기였다"고 말했다. 모두가 한 마음 한뜻으로 통하고 있었기에 넥타이부대의 시위 참여 참산이 가능했다는 얘기다.
6월 항쟁 30주년을 코 앞에 앞둔 작년 겨울 박씨는 또다시 광장에 나왔다. 그는 광화문 광장을 밝힌 '국정농단' 촛불집회를 보면서 '우리 국민이 위대하고 국민존엄 승리로 6월항쟁 정신이 다시 부활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30년 전 명동 일대는 최루탄으로 뒤범벅이 된 전쟁터였지만 수백만 시민이 참여하고도 질서정연한 축제분위기를 만들어낸 집회를 목격하면서 그는 30년 사이 격세지감 수준으로 발전한 시민의식의 성장도 절실히 느꼈다.
그는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앞장선 386세대로서 이제 386세대들이 첨예화된 세대 갈등 해결에도 앞장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나 역시 노동운동에 참여했고 많은 후배를 길렀지만 지금 대한민국 노조는 지나치게 정치화되면서 조합원의 현실적 문제에 눈감고 있다"며 현재의 노동운동에 대해서도 쓴 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양연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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