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한국전쟁 참전한 미군 유가족의 눈물과 자긍심
입력 2017-06-05 15:21 

70년 가까운 세월 이국에 묻힌 가족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 유가족이 있다. 타인의 편견에 아버지를 숨기고 재혼한 어머니를 대신해 그의 흔적을 찾아다닌 사람이 있다. 언젠가 허락된다면 북한 땅 어딘가에 계실 아버지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딸과 아들은 칠십을 바라보는 백발 노인이 되었다. 그렇게 세월은 흘렀고 아버지를 기다리던 자식들은 분단된 한반도의 경계선인 판문점에서 아버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매일경제는 최근 6.25전쟁에서 가장 처절한 전투로 불리는 '장진호 전투'에서 실종된 미국 참전 군인 유가족을 만났다. 아직 돌아오지 못한 아버지가 그들에게 남긴 상처와 영광에 관한 이야기를 조심스레 물었다.
1950년 함경남도 개마고원 장진호에서 벌어진 이 전투의 생존자는 '장진호에서 선택 받은 이들(The Chsoen Few)'라 불린다. 전투에 참여한 미 해군 1사단은 4418명의 전사상자를 냈다. 748명이 사망했고 192명이 실종됐다. 실종된 시신은 모두 장진호에 묻혀있다.
지난 달 국가보훈처 초청으로 아버지를 찾아 한국땅을 밟은 이들은 당시 실종된 어버이보다 어느덧 세 곱절을 더 살았다. 실종장병 추모식을 갖고 롯데월드타워를 돌아보며 지난 세월 한국의 발전상을 경험했다. 지난달 24일 열린 추모식에서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은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은 여러분의 형제이시자 아버지이신 참전용사의 숭고한 희생과 공헌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가족과 동행 취재를 한 기자는 이들 가슴 속에 각인된 아버지의 역사를 꺼내달라고 했다. 백발 노인이 된 자녀들은 옛 이야기를 지금의 역사처럼 말하며 울먹거렸다. 그를 숨기고 기다렸던 어머니 이야기를 할 때면 숨을 고르며 말을 잇지 못하는 순간이 여럿 찾아왔다.
◆아버지 너무 그립고 존경
장진호 전투에서 실종된 상병 토마스 알렌 두피(당시 22세)의 딸 리넷 투커(66)씨는 당시 어머니 뱃속에 있었다. 그의 존재를 알게된 건 재혼한 어머니가 비밀이라며 2층 방에서 말해준 초등학교 6학년 때다. 투커 씨는 "그때서야 나에게 두 아버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보지못한 아버지가 보고싶어 찾아 다니기 시작했다. 이제 아버지는 나에게 역사가 되었다"고 말했다.
사회적 편견이 두려워 아버지 존재를 숨겼던 어머니는 참전 중인 남편을 사랑했다. '배달불가'라는 마크가 찍혀 돌아오는 편지를 애써 외면한 채 매일 전쟁 중인 한반도에 편지를 보냈다. 투커 씨가 보관하고 있는 어머니 편지 안에는 남편이 반드시 살아 돌아올 것이란 희망이 담겨 있다. 투커 씨가 보여준 어머니 편지는 항상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내 남편 알렌에게"라는 문장으로 시작했다.
1950년 12월 미국 정부는 투커 씨 가족에게 상병 알렌 두피의 공식 실종을 통보했다. 투커 씨는 그후 한 달 뒤 태어났다. 그녀의 오빠 패트릭 투커(68)는 당시 두 살이었다. 어머니와 가족은 아버지 실종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백방으로 찾아달라고 요청했고 답장 없는 편지를 수개월간 보내기도 했다.
투커 씨는 추모행사에 참석해 참전기념비 앞에서 아버지를 향한 편지를 낭독했다. 그녀는 "아버지의 희생을 원치 않았다. 아버지가 너무 그립고 또 보고싶다. 하지만 한국을 찾아 왜 당신의 희생이 중요했고 가치가 있었는지 알게됐다"고 울먹였다. 그녀의 오빠 패트릭 투커는 "남북한이 통일돼 장진호에 묻힌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하는 것, 그것이 내 마지막 소원"이라고 했다.
◆평생 남편 기다리며 5남매를 키운 어머니
토마스 몽고메리(69)씨의 아버지는 해군 장교 출신이었다. 전쟁 중 폭격기를 몰았던 아버지는 중공군의 공격에 추락한 전투기와 함께 실종됐다. 몽고메리 씨는 당시 아버지를 기억하지 못할만큼 어렸지만 부친 뜻을 따라 해군 장교로 복무했다.
그는 "전쟁에 참전한 군인은 모두살아 돌아올 것이라 생각한다. 아버지 역시 그랬을 것"이라며 "결국 선택을 받지 못하셨다"고 말했다. 그 역시 아버지 시신을 아직 수습하지 못했다. 70년 가까이 아버지를 찾아 헤멨지만 아직 답을 얻지 못했다. "한국·미국 정부에 수차례 요청했지만 북한의 거부로 아버지를 되돌려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몽고메리 씨는 "어머니는 5남매를 키우시며 평생 아버지를 기다렸다. 언젠가 돌아오실 것이라 생각해 재혼하지 않으셨다"며 "5남매가 물질적으로 어려움이 없도록 여러 직장을 한꺼번에 다니셨다. 어머니는 그렇게 아버지를 사랑했고 그리워했다"고 말했다.
한국을 처음 찾은 몽고메리 씨는 "살다보니 여기까지 오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참 아름다운 나라"라며 "한국을 보면서 북한을 떠올렸다. 지금 이 나라의 아름다움을 느끼며 아버지 죽음이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몽고메리 씨는 "판문점에서 바라본 북한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만큼이나 가깝고도 멀었다. 아버지를 찾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며 "이제 나에게도 삶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지금 이 세상에서 아버지를 단 한 번만 더 만나고 싶다"고 입술을 깨물었다.
[박태인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MBN APP 다운로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