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지난해 아시아 지배구조 순위 8위라는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조사대상 11개국중 8위니까 사실상 최하위권이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이 성적이 지난 2010년 이후 8위를 벗어난 적이 없다는 것. 2년에 한번씩 이뤄지는 이 평가에서 한단계도 성적이 올라간 적이 없다.
아시아기업지배구조협회(ACGA)와 글로벌 금융회사 CLSA가 지난해 우리나라 기업 지배구조 건전성을 평가한 결과다. ACGA는 아시아 기업 1200개를 대상으로 기업 지배구조의 건전성을 가늠할 수 있는 50여개 기준을 적용했다. 이사회 독립성, 공시 투명성, 규제 환경 등이 포함됐다. 일본은 11개 국가 중 3위, 한국은 8위였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의 연례 평가 보고서를 봐도 한국 기업 지배구조 후진성은 여실히 드러난다. 작년 우리나라의 순위는 61개국 가운데 29위였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가장 낮은 순위다. 종합지표의 주요 지표 중 하나인 '경영 관행' 부문에서는 최하위였다. '기업윤리실천', '경영자의 사회적 책임' 등 지표 순위에서도 각각 58위, 60위로 바닥권을 맴돌았다.
신경철 삼정KPMG 전무는 "기업이 나라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큰 만큼 후진적 기업 지배구조는 국가경쟁력을 크게 떨어뜨릴 수 있다"며 "이는 우리 자본시장에 대한 불신과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 주식에 대한 저평가 기조)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지배구조 개선에 대한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한국 증시에 상장된 기업의 주식 가치는 싱가포르의 51% 수준이다. 비슷한 성적을 내는 두 기업을 싱가포르와 한국에서 상장하면 한국 기업 시총이 싱가포르 기업 절반에 그친다는 얘기다. 대만, 말레이시아와 비교해도 70% 수준에 불과하다. 한국 주식에 대한 저평가 기조는 주로 지정학적 위험과 후진적 기업 지배구조에서 기인된다. 이 때문에 제어하기 힘든 지정학적 리스크보다는 '기업 지배구조'를 손보자는 여론에 힘이 실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복잡한 지배구조는 짧은 자본주의 역사를 거치며 기업이 압축 성장한 결과라는 점에서 특수성이 고려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팽팽하다. 한국 기업의 복잡한 순환출자 구조도 따져보면 '규모의 경제'를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대규모 투자를 집행하기 위해 계열사별로 자금을 동원하다보면 필연적으로 복잡한 순환출자 고리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부실 위험에 빠진 계열사를 정부 주도로 구조조정하면서 순환출자 고리가 발생한 경우도 있다. 외환위기 당시 현대자동차그룹이 기아차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현대모비스→현대차→기아차→현대모비스' 형태의 순환출자가 나온게 대표적이다. 당시 정부가 1999년 말까지 부채비율을 200% 밑으로 내릴 것을 요구하면서 계열사들이 대규모 유상증자 등에 참여하며 순환출자 구도가 생겨난 측면도 있다. 물론 적절한 시기에 이를 해소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대기업의 책임이 적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대기업을 '악의 축'으로만 몰고 가는 것은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지 않은 판단이라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박승록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순환출자는 경제력 집중, 소유와 지배의 심한 괴리, 무분별한 사업영역 진출 등 많은 문제를 야기하는 재벌 문제의 많은 부분이 이것에서부터 초래됐다"며 "보유주식의 이전 및 교환, 한시적 세제혜택과 같은 다양한 방법을 충분한 시간을 갖고 추진한다면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증권부 기획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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