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냉전시대 베를린필 대항마, 추억과 함께 오다
입력 2017-03-20 15:32  | 수정 2017-03-22 08:35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 오케스트라

시작은 비극이었다. 1945년 이념에 따라 나라와 수도가 동서로 쪼개졌고, 명성을 누리던 베를린 필하모닉은 서베를린에 남게 됐다. 동독 정부로서는 베를린 필의 대항마가 필요했다.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당국은 정책적으로 빼어난 실력의 연주자들을 불러모았고 그렇게 탄생한 것이 베를린 심포니(BSO), 오늘날 유럽의 명문악단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전신이다. 정치·군사적으로뿐만 아니라 문화적 우위를 점하기 위한 경쟁의 산물이었다. 외부 세계와 교류가 잦았던 서독에 비해 짙고 묵직한 옛 독일의 사운드를 좀더 온전히 이어나간 이들은 오랜 기간 전통의 수호자로 일컬어졌다.
역사의 아픔을 자양분 삼아 수십년 간 단단한 거목으로 자라난 이 명문악단이 12년 만에 한국을 찾는다. 역대 두 번째 내한으로, 지난 2006년 악단명을 BSO에서 현재 이름으로 바꾼 후로는 첫 방문이다.
이번 공연은 두 가지 면에서 더욱 뜻 깊다. 우선 여든 한 살의 이스라엘 출신 마에스트로 엘리아후 인발이 지휘봉을 잡는다는 점. 특유의 엄격하고도 완벽한 사운드로 잘 알려진 20세기 대표적 거장 세르주 첼리비다케의 가르침을 받고 1963년 귀도 칸텔리 지휘 콩쿠르에서 우승한 이래 세계 주요 악단을 이끌어온 그는 이 시대의 대표적 거장 중 하나다. 2000년대 중반 두 번 내한한 데 이어 4년 연속 서울시립교향악단과 호흡을 맞춰왔을 정도로 한국과 인연이 깊은 그는 우리 클래식 관중에게 친숙한 얼굴이다. 지난 1월 그가 서울시향과의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에서 풀어낸 노련한 솜씨는 청중의 뜨거운 찬사를 이끌어냈다. 인발은 2001년부터 5년간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수석지휘자로 활약했다.
국내 팬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높은 말러 교향곡 5번이 연주되는 점도 주목할 만 하다. 시리도록 아름다운 선율로 유명한 4악장 아다지에토를 비롯해 드라마틱한 매력으로 가득한 이 걸작을 악단이 냉전 시절부터 갈고 닦아온 비장하고 중후한 사운드로 감상하는 것은 흔치 않은 기회다. 더욱이 인발은 1980년대부터 말러 교향곡 전곡 음반을 완성한 특출난 말러 스페셜리스트. 지난해 3월 서울시향과의 말러 연주를 앞두고 기자와 만난 그는 "뭐든지 처음은 특별하지만 말러 작품을 처음 지휘한 순간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인상으로 남아 있는데, 마치 내가 쓴 것 같은 혹은 날 위해 쓴 것 같은 느낌이었다"며 말러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드러냈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위대한 예술가들은 정밀한 지진측정기처럼 다가올 미래를 앞서 감지하곤 합니다. 시대를 앞선 환상적인 음악을 남긴 말러가 꼭 그랬죠."
이날 공연의 1부에서는 피아니스트 김혜진이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 20번을 선보인다. 2005년 이탈리아 부조니 국제 콩쿠르에서 17살 나이로 당시 역대 최연소 입상(3위)을 거둔 이래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 오케스트라와도 여러 차례 협연한 바 있다. 공연은 24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오신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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