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연금자산이 지난해 1000조원을 처음 넘어서면서 빠르게 몸집이 커지고 있지만 노후대비 수단으로서 제 역할이 가능할지에 대해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연금자산의 절반 이상이 예금·채권 등 안전자산에 쏠려 있어 저금리가 지속되면 노후대비용 자금을 제대로 마련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얘기다.
전문가들은 연금자산의 안정성을 확보하면서도 수익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주식·채권·원자재 등 다양한 자산으로 분산투자가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일반 개인이 자산배분과 비중 조절을 하기는 쉽지 않은 만큼 연금형 자산배분 상품 가입을 유도하는 방향으로 제도 개선을 서둘러야 한다는 지적이다.
22일 매일경제신문이 국민연금, 퇴직연금, 개인연금 등 3층 연금 적립금을 분석한 결과 전체 적립금 1009조원 가운데 71%인 718조원은 예금·채권 등 안전자산인 것으로 나타났다. 사적연금 위주로 연금제도가 발달한 미국과 호주 연금자산 가운데 주식 자산 비중이 2012년도 기준 각각 49%와 46%인 것과 비교하면 국내 연금자산의 안전자산 쏠림이 매우 심한 편이다.
국민연금은 작년말 기준 전체 적립금 555조원 가운데 채권이 303조원으로 비중이 56%(국내채권 52%, 해외채권 4%)를 차지한다. 전체 적립금의 절반이 넘는 국내채권은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금리인하 국면에서 지난 2015년까지 투자위험이 낮으면서도 연간 4% 이상의 안정적 수익을 내는 '효자' 역할을 해왔지만 작년부터는 상황이 달라졌다. 국민연금이 지난해 1월부터 11월까지 국내채권 투자로 벌어들인 수익률은 1.6%에 불과하다. 미국이 기준금리 인상 국면으로 돌아선데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으로 인플레이션 기대가 반영된 탓이다. 올해도 미국이 3차례 안팎 기준금리를 올릴 것으로 예상되면서 국내채권도 금리인상 리스크에 노출됐다는 지적이다.
퇴직연금은 지난해 6월말 기준 예금이나 국공채 등 안전자산 위주로 투자하는 확정급여(DB)형이 86조원으로 전체 적립금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67%에 달한다. DB형은 근로자에겐 퇴직 직전 평균월급을 기준으로 퇴직금을 지급하는 대신 기업이 책임을 지고 자금을 굴리는 형태의 퇴직연금이다. 그동안 상대적으로 금리수준이 높았고 채권값도 상승하는 국면에 있었기 때문에 상당수 기업들이 DB형태로 예금·채권 투자에 의존해왔다. 근로자가 회사로부터 매년 퇴직금을 중간정산받아 직접 굴리는 확정기여(DC)형에 포함된 원리금보장 상품까지 포함하면 안전자산 비중이 89%에 달한다. 이 때문에 평균수익률도 1%대 중반으로 추락했다.
지난해 300조원을 넘어선 개인연금도 투자자산 가운데 원리금보장형 비중이 높은 보험 상품이 90%에 달한다. 금융위원회에 따르면 2015년말 기준 개인연금 적립금 292조원 가운데 10년 이상 납입때 연금수령 비과세 혜택이 있는 세제비적격 연금보험이 183조원, 매년 납입액 400만원까지 세액공제 혜택이 있는 연금저축보험이 81조원이다. 2005년부터 2014년까지 10년간 개인연금 상품별 연평균 수익률을 비교해보면 연금펀드가 8.9%인 반면 연금보험 4.3%로 절반에 불과하다. 더구나 2015년부터 국내 기준금리가 빠른 속도로 하락하면서 공시이율에 연동되는 연금보험 평균수익률도 같은해부터 2%대로 떨어졌다. 예금금리나 최근 물가 상승 수준을 감안하면 손해본 셈이다.
전문가들은 최근 5년간 전략적으로 채권 비중을 줄이고 있는 국민연금의 사정은 그마나 낫다고 보고 있다. 국민연금은 올해말까지 국내채권 비중을 현재 52%에서 49.5%로 줄일 계획이다.
송홍선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사적연금의 90% 이상이 원리금보장 금융상품에 쏠려 있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면서 "수익성을 고려해 개인이 손쉽게 자산배분 투자를 할 수 있도록 퇴직연금이나 개인연금에 '디폴트옵션(Default Option)' 제도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디폴트옵션은 연금 가입자가 별도 상품을 선택하지 않으면 금융회사별 대표 연금상품으로 자동 운용되는 제도다. 해외의 경우 연금 가입자의 생애주기별로 주식·채권·대체 자산 비중을 자동으로 조절해주는 자산배분형 상품이 주로 들어간다. 금융위원회는 지난해부터 디폴트옵션 제도 도입을 위한 검토작업을 진행중이다.
손성동 한국연금연구소 소장은 "노후 자금을 준비하는데 있어 높은 수익을 위해 하나의 자산에 투자하는 건 너무 위험할 수 있다"면서 "전문가에 위임하거나 자문받는 형태로 다양한 자산에 분산투자하는 수단을 정책적으로 제공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 <용어 설명>
▷ 확정급여·확정기여 : 퇴직연금은 크게 확정급여(DB·Defined Benefit)형과 확정기여(DC·Defined Contribution)형 두 가지로 나뉜다. DB형은 기업이 연금 운용 주체를 선정하는 대신 지급액을 보장하고 운용에 따른 수익이나 손실은 회사가 책임을 지는 구조다. DC형은 근로자가 직접 운용 주체를 선정하는 대신 수익률에 대한 책임을 지는 방식이다.
▷디폴트옵션(Default Option) : 금융회사별로 연금 대표 상품(모델 포트폴리오)을 만들고 연금 가입자가 운용 방법을 지정하지 않을 경우 대표 상품으로 자동 운용되는 제도다.
[최재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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