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수은주가 올 겨울 들어 가장 낮은 영하 12도까지 '뚝' 떨어진 지난 24일 새벽 4시. 지하철 7호 선 남구로 역 삼거리 앞엔 어둠을 헤치고 삼삼오오 인파가 모여 들었다. "아우, 아주 꽁꽁 얼어붙네." 하얀 입김을 내뱉으면서 이들이 들어서는 곳은 일용직 인력사무소의 천막. 노란 주전자가 얹혀 있는 작은 천막안 난롯가 앞에 머리가 하얗게 샌 할아버지들이 심심찮게 눈에 들어왔다.
남구로 역 인근 삼거리는 60여개 인력 사무소가 모여 있어 하루 평균 1000여명의 일용직 노동자들이 하루 밥벌이를 찾는 곳이다.
5~6명의 일행과 매일 이곳을 찾는 김도협(65)씨도 그들 중 하나다. 김씨는 건설현장에서 30년을 누비며 소위 '노가다' 판에서 잔뼈가 굵었다. 새벽 4시 부터 나와 해질녘까지 일해 받는 돈은 12만원 남짓. 60세 노인의 하루 일당으로 제법 '짭잘'해 보이지지만 인력사무소에서 수수료로 1만2000원을 때가고 현장으로 가는 승합차 이용료 4000원을 지불하고 나면 수중에 떨어지는 돈은 10만원 정도다. 문제는 이마저도 '운수좋은 날'에야 가능한 일이라는 것.
한 겨울 건설현장의 일거리가 성수기의 절반 가까이 준 탓에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헛걸음을 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현장에서 만난 S인력사무소 직원은 "원래 몇 년 전까지 연령제한이 60세 였는데 경기가 계속 침체되면서 워낙 노인분들이 많이 찾아 오다 보니 연령제한을 65세로 늘렸다"고 말했다.
그러나 현장에서 만난 할아버지들은 "나이제한을 늘렸어도 요즘은 중국·베트남 등 동남아에서 젊은 사람들이 많이 온다"며 "현장에선 한 살이라도 젊은 인부들을 선호해 일감을 빼앗기고 빈손으로 돌아갈 때도 허다하다"고 말했다.
설대목을 앞둔 최근 1~2주 사이엔 유독 60세 이상 노인들 발길이 많아졌다고 한다. 명절을 앞두고 손주·손녀들에게 줄 '세뱃돈', '차례상비용'이라도 마련해보려고 고령의 나이에 '단기알바'를 찾아오고 있다는 게 인력사무소들 얘기다. 구로구에 살고 있다는 62세 박모씨는 "동네에서 아파트 경비로 용돈 벌이라도 했는데 얼마 전 관리사무소에서 무인경비인가 뭔가 설치하면서 일자리가 없어졌다"고 말했다. 그는 "몇 일 있으면 아들 내외와 손주들이 집에 찾아올텐데 할애비가 용돈이라도 집어주려면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 동네 경로당 친구들 따라 나왔다"고 말했다.
일용직 건설현장에 일거리를 찾아 모여드는 노인들 모습은 지난 1997년 IMF와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등 두번의 경제파고를 넘은 뒤 시간이 갈수록 우리시대 빈곤노인층 들의 모습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생존수명은 갈수록 높아지고 긴긴 불황의 터널 속에서 노인들 지갑은 갈수록 얇아지는데 반해 일자리는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최근 통계청, 한국은행, 금융감독원의 '가계금융 복지조사' 결과를 보면 2015년 65세 이상 노인 빈곤율은 61.7%로, 전년보다 1.5%포인트 상승했다. 이는 관련 통계가 작성된 2011년 이래 가장 높은 수치다. 은퇴 후에도 일을 해야 먹고 살 수 있는 노인은 갈수록 많아지는 데 노인들 일자리 질은 턱없이 떨어진다.
한국노인인력개발원에서 조사한 통계에 따르면 60세 이상 전체 임금근로자 195만 5000명 중 비정규직은 131만 7000명으로 67.3%를 차지했다. 60세 이상 근로자 10명중 7명은 건설현장 일용직, 아파트경비원 등 비정규직으로 근무하면서 언제 해고당할지도 모르는 불안감에 떨고 있는 처지인 셈이다.
최근 정부의 노인기준 상향(65세→70세) 추진은 울고싶은 데 '뺨'때리는 격이 됐다고 한다. 박씨는 "노인 기준이 올라가면 '복지는 조금 줄어도 더 오래 일할 수 있다'고 TV방송에 나오는 데 우리 같은 노인들 일자리가 있으면 엄동설한에 이 고생을 하고 있겠냐"며 "현실은 '개뿔'도 모르는 나랏님 얘기"라고 언성을 높였다. 천막서 얘기를 나누는 사이 어느 새 하루채용이 마감되는 오전 6시가 됐다. 박씨를 비롯한 수십명 노인들은 일감을 받지 못해 씁쓸히 발걸음을 집으로 되돌리고 있었다.
[유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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