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미선이·효순이 추모 집회,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 2008년 한미 쇠고기 협상 반대 집회 그리고 최근 벌어지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 퇴진 집회 등 촛불집회는 이제 우리나라 집회·시위 문화의 대명사가 됐다. 우리나라의 성숙한 시민의식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자 국민들의 정치 축제로 자리잡은 촛불집회는 어떻게 탄생하게 됐을까.
촛불집회의 시작은 2002년 11월 27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앙마라는 아이디를 쓰는 평범한 학원 강사, 김기보(당시 30세)씨가 한 언론사 게시판에서 올린 글이 발단이 됐다.
그는 광화문에서 미선이 효순이와 함께 수천 수만의 반딧불이 됩시다”라며 촛불을 들고 광화문을 걸읍시다. 6월의 그 기쁨 속에서 잊혀졌던 미선이 효순이를 추모합시다”라고 촛불집회를 제안했다. 이 글은 인터넷을 타고 일파만파 확산됐다.
그리고 약속한 11월 30일이 되자 거짓말처럼 무려 1만명의 인파가 광화문 사거리에 운집했다. 주최측이 없다보니 한쪽에서는 노래를 부르고, 다른쪽에서는 자유발언이 진행되기도 했다. 최초 제안자인 김기보씨도 화단에 올라서 집회 참가자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이날의 시위는 특정 집단이 주도한 기존 방식과 달리 온라인 네트워크를 활용한 개인들의 자발적인 참여라는 측면에서 언론의 큰 관심을 끌었다. 이후 촛불집회 참가자는 일주일 뒤인 12월 7일 5만명, 12월 14일 10만명으로 불어나게 된다.
하지만 김기보씨는 촛불집회의 방향성과 순수성과 관련해 논란의 중심에 서게된다. 처음에는 추모 성격이었던 촛불집회가 점차 자발성을 잃고 반미 집회 양상으로 번져가면서 경찰과의 충돌도 벌어졌다. 결국 김씨는 범국민 대책위원회와 별도로 평화와 반전을 주제로 촛불집회를 열겠다”고 선언하게 된다.
또 정치권에서는 자작극 논란이 제기됐다. 한나라당은 김기보씨가 인터넷 게시판에 촛불시위 제안글을 올린 뒤 이를 자신이 기자로 활동하던 인터넷 신문을 통해 마치 제3자의 글인양 기사로 보도했다며 조작·선동이라고 비판했다.
김씨도 유명해지기 싫어 다른 사람의 글인 것처럼 표현했다”며 이 사실을 시인했다. 네티즌 ‘앙마를 2002년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던 이 인터넷 신문도 논란이 심화되자 제안자가 자신임을 밝히지 않고 ‘자유토론방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쓴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고 또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라며 공식 사과했다.
[디지털뉴스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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