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현실밀착형 재난영화 ‘판도라’가 그려낸 지옥도
입력 2016-11-30 15:28  | 수정 2016-11-30 19:08

거대한 원자력발전소의 그늘 안에서 옹기종기 살아가는 경남의 한 마을. 일견 평화로워 보이지만 실은 위태로운 평화다. 주민의 다수를 차지하는 발전소 직원들은 아침마다 원전 폐기를 요구하는 시위대 사이를 뚫고 가며 무심히 작업복을 입고 헬멧을 두른다. 잊을만 하면 터져 쉬쉬 묻힌 발전소 내 안전사고로 남편과 자식을 떠나보낸 주민들은 애써 웃으며 일상을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날 마을에 규모 6.1 강진이 밀려오고, 수십년 세월 제대로 정비 한번 거치지 않은 노쇠한 원전은 폭발하고 만다. 이후에 펼쳐진 풍경은 가장 끔찍한 지옥, 언젠가 내게 닥칠지도 모르는 지극히 현실적 고통의 공간이기에 더욱 공포스러운 지옥 그 자체다.
오는 7일 개봉하는 영화 ‘판도라가 베일을 벗었다. 제작기간만 4년, 150억원의 제작비를 들여 만든 국내 최초의 원전사고 소재 재난 블록버스터란 면에서 일찌감치 올 겨울 최대 화제작 중 하나로 꼽혔다. 극중 한심한 대처로 국민을 사지로 모는 무능한 대통령과 정부의 모습이 그려진다는 점 역시 현재의 정국과 묘하게 겹쳐지며 세간의 주목을 끌고있다. 2012년 감염병을 소재로 한 재난영화 ‘연가시로 450만명을 동원한 박정우 감독의 두번째 대작 상업영화다.
4년 전부터 생각해온 영화의 메시지는 단 하나, 탈핵입니다. 시국을 비판하려는 영화로 바라보는 건 본질에서 한참 벗어난 시각이죠.” 시사회 다음날인 30일 오전 소격동 카페에서 만난 박 감독은 영화가 원래 의도한 주제보다 현 시국과 관련돼 회자되는 상황이 다소 걱정스럽다고 말문을 열었다. 당초 찍었던 분량 중 총리가 대통령이 판단능력을 상실했다”고 소리치거나 대통령이 재난수습 도중 상황실을 떠나 관저에 머무는 장면 등 공교롭게도 지나치게 시국을 연상시키는 부분을 들어내야 했던 비화도 설명했다.

영화의 전반부가 원전 사고가 일어나는 과정과 재난 현장을 촘촘히 묘사하는 데 온전히 할애된다면 후반부는 등장인물들의 절절한 스토리에 치중한다. 무기력한 공권력 대신 목숨을 걸고 재난 수습에 나서는 발전소 직원들(김남길·정진영·김대명 등)의 헌신적 모습과 이들의 가족 이야기가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한다. 소시민 영웅과 가족애 등 다소 뻔한 서사를 택한 이유를 묻자 박 감독은 큰 것을 얻기 위해 작은 것을 포기한 셈”이라고 답했다.
선택지가 있었습니다. 하고픈 말을 노골적으로 하기 위해 저예산으로 실험적 형식을 도입하거나, 익숙한 상업영화의 틀을 쓰거나였죠. 결국 제대로 된 상업영화로 수백만 명이 이 주제를 접하게 하는 게 더 효과적일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만 재난 묘사만큼은 어느 영화보다 사실적이고 현실감 있게 찍어 진부함을 뛰어넘는 공감대를 형성하고자 했죠.”
실제로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다큐멘터리처럼 세세히 그려진 원전 사고 현장의 면면들이다. 진짜 발전소를 빌려 촬영한 듯한 느낌을 주기 위해 제작진은 강원도 춘천에 콘크리트를 깔아가며 5천평 규모의 거대한 세트를 지었다. 동원된 엑스트라만 6000명. 영화 전체의 절반 이상에 최첨단 컴퓨터그래픽(CG)기술이 도입됐다. 지난 9월 경북에서 발생한 대규모 지진 이후 관객들이 극장서 체감할 공포의 수준은 상당할 수밖에 없다.
민감하고도 복잡한 원전이란 소재에서 최대한 현실감을 살리기 위해 박 감독은 대사에 나오는 단어와 수치 하나하나를 사전에 법적 자문을 거쳤다. 영화 찍기 전 배우와 스텝들을 모아놓고 실제 원전사고에서 방사능에 피폭된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피해자들의 실제 사진을 보여줬습니다. 너무 끔찍해서 실은 영화에서 그 수준을 많이 감춰야 했습니다.” 온몸이 썩어들고 피를 토하며 죽어가는 극중 인물들의 모습은 12세 관람가 등급 치고 너무 끔찍한 게 아니냐는 지적을 받을 만 하다.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정의로운 청년 ‘재혁을 맡은 김남길과 사명감 넘치는 소장 ‘평섭 역의 정진영, 무력함에 몸서리치는 대통령 역의 김명민 등의 호소력 짙은 연기가 인상적이다. 개봉은 내달 7일, 12세 관람가.
[오신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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