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故 백남기 농민, 광주 망월묘지 이한열·이철규 열사 곁에서 영면
입력 2016-11-07 08:22 
故 백남기 농민의 묘비/사진=연합뉴스
故 백남기 농민, 광주 망월묘지 이한열·이철규 열사 곁에서 영면



경찰 물대포를 맞고 쓰러져 약 10개월간 사경을 헤매다 숨을 거둔 고(故) 백남기 농민이 6일 광주 망월묘지 3묘원 민족민주열사묘역에서 영면에 들어갔습니다.

사망 42일만에 한 줌 재로 돌아간 고인은 광복 70주년 '수요집회'에서 분신해 숨진 최현열씨 왼편에 마지막 안식처를 마련했습니다.

'5·18 구묘역' 또는 '망월동 묘역'으로도 알려진 망월묘지 3묘원은 1976년 일반묘지로 조성됐습니다.

1980년 이후 5·18 희생자 유해가 안장됐고, 민주화운동에 헌신하다가 숨진 이들이 안장되면서 민족민주열사묘지로 알려졌습니다. 2005년 6월 5·18 사적지로 지정됐습니다.


1987년 6월 경찰의 최루탄에 숨진 연세대 이한열 열사, 1989년 5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도피 생활을 하던 중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된 이철규 열사 등이 안장됐습니다.

향년 69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백남기 농민의 삶은 5·18과 한국 민주화운동을 떼어놓고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1947년 전남 보성군 웅치면에서 태어난 고인은 1968년 중앙대학교 행정학과에 입학해 민주화운동에 앞장섰습니다.

박정희 정권에서 2차례 제적당한 뒤 1980년 '서울의 봄' 때 복학해 총학생회 부회장을 맡았다. 5·17 비상계엄 확대로 신군부에 의해 징역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고인은 이듬해 3·1절 특사로 풀려나 보성으로 내려간 뒤 농민의 길을 걸었습니다. 천주교 신자였던 그는 가톨릭농민회에서도 활동했습니다.

백남기 농민은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후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던 동료들이 정계에 입문해 성공가도를 달리던 시절 "죽은 사람들도 있는데 살아남은 자가 무슨 공을 따지겠느냐"며 5·18 유공자 신청을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지난해 11월 14일 서울에서 열린 1차 민중총궐기 집회에 참가한 백남기 농민은 경찰 물대포에 맞고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고인은 박근혜 대통령이 후보 때 내걸었던 쌀값 21만원 보장 공약을 지키라고 요구하며 민중총궐기에 참가했습니다.

백남기 농민은 경찰 물대포에 맞고 쓰러져 혼수상태에 빠진 지 317일 만인 지난 9월 25일 서울대병원에서 사망했습니다.

광주시와 5월 단체·시민단체 등 9개 단체로 구성된 5·18 구묘지 안장 테스크포스(T/F)는 이달 1일 대표자 회의를 소집해 백남기 농민의 시신을 망월공원묘지에 안장하고 싶다는 유가족의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뜻을 모았습니다.

이르면 올해 말 백남기 농민이 5·18 유공자로 결정되면 그의 시신은 망월공원묘지에서 500여m 떨어진 국립 5·18민주묘지에 안장될 수 있습니다.

고인의 장례위원회 관계자는 "5·18 유공자로 인정되더라도 국립묘지로 이장하는 방안은 염두에 두지 않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MBN 뉴스센터 / mbnreporter01@mb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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