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몰락했던 日반도체, AI·IoT·자율차 부활시동
입력 2016-08-22 17:04 

일본 경제의 ‘잃어버린 20년과 함께 몰락했던 일본 반도체 산업이 구조조정을 통한 경쟁력 제고와 제로 금리를 등에 업은 인수합병(M&A)을 무기로 부활을 꿈꾸고 있다. 90년대와 2000년대 메모리(D램)와 비메모리(시스템LSI 등)를 놓고 미국, 한국 기업과 벌인 치킨 게임에서 참패한뒤 존재감을 잃었던 일본 반도체업체들이 4차산업혁명을 이끄는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무인차(자율주행차) 시대를 맞아 반도체 영토재건에 공격적으로 나서고 있다.
지난 20여년간 영욕의 세월을 보내온 일본 반도체 업체들이 세계 반도체 시장에 다시 화려한 부활을 알리기 시작한 것은 최근 1~2달 사이다.
22일 니혼게이자이신문은 르네사스일렉트로닉스가 이달내에 미국 차량 반도체 기업 인터실을 3000억엔(3조3000억원)에 인수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르네사스가 인터실을 인수하기로 한 것은 이제 일본 반도체 기업들이 구조조정을 마치고 성장으로 방향을 틀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구조개혁 이후 어려움을 겪어오다 2014년 흑자전환에 성공한 르네사스가 다시 성장을 위해 본격 투자에 나선 것이다. 르네사스는 소비전력을 최소한 억제하는 고효율 반도체에 강한 인터실을 인수해 무인차와 엔진 전자제어에 특화한 반도체 시장에 주력할 계획이다. 자동차 반도체 시장은 현재 연간 3조엔 수준으로 세계 반도체 시장 규모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아직 미미하지만 전기차와 무인차 등장과 함께 성장잠재력이 큰 분야다. 이번 인수로 르네사스는 차량 반도체 분야에서 1위를 다투게 됐다. 이에 앞서 일본 기업의 반도체 시장 재등극을 알린 상징적인 사건은 뜻밖에도 반도체 경험이 전무한 소프트뱅크가 일본 M&A 사상 최대 금액인 36조원에 영국의 ARM을 사들인 것이다. 소프트뱅크는 스마트폰 두뇌에 해당하는 AP(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 설계 기술을 사실상 독점하고 있는 영국 ARM을 3조3000억엔(36조원)의 거금을 들여 인수했다. 메모리 반도체 시장이 레드오션화된 상황에서 향후 반도체 성장을 이끌어갈 것으로 예상되는 차량용 반도체와 사물인터넷(IoT) 반도체 시장 주도권을 잡기 위한 포석이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은 모바일 두뇌인 AP의 설계 기술을 사실상 독점하고 있는 ARM 인수를 통해 사물인터넷(IoT) 칩 시장은 물론 스스로 인류역사상 특이점(싱귤레러티)이라고 평가한 인공지능(AI) 시장에서 주도권을 잡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내놓기도 했다. 손정의 회장은 20년 후에는 ARM 칩이 연간 1조개 이상 출하될 것”으로 자신하기도 했다. 일본이 단숨에 반도체 시장의 핵으로 등장한 것이다. IoT 시대의 핵심인 센서 분야에서는 이미 소니가 도시바 센서 부분을 인수해 영상 센서 수위를 차지하고 있고 공장 자동화 센서 부문에서는 키엔스가 세계 최고 기술력과 점유율을 갖고 있다. 모바일 메모리인 낸드플래시 시장에서도 일본 토종기업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일본 기업 도시바가 1년여에 걸친 구조개혁을 마친뒤 미국 웨스턴디지털(WD)과 공동으로 향후 3년간 1조5000억엔(약 16조7000억원)을 세계최대 단일공장인 미에현 욧카이치공장에 집중 투자해 압도적인 세계 1위인 삼성전자를 추격하겠다고 선언했다. 잃어버린 20년 동안 해마다 구조조정으로 점철됐던 일본 기업들이 최근 한두달 사이에 세계 반도체 시장이 주목할 만한 뉴스를 잇따라 내놓으며 존재감을 높이는 분위기다.
TV, 냉장고 등 가전을 중심으로 세계 전자시장을 일본 기업들이 장악하고 있던 70~80년대까지만 해도 세계 반도체 시장은 일본 기업들의 독무대였다. 1990년 세계 반도체 시장 상위 5위 가운데 NEC와 도시바가 1·2위를 다투고 히타치제작소가 4위를 차지하는 등 3곳이 일본 기업이었다. 하지만 90년대 들어 PC, 노트북 등 컴퓨터 시대가 열리고, 닷컴과 모바일 시대로 이어지는 동안 일본 반도체 기업들은 급속히 몰락했다. 닛케이는 2010년 ‘반도체 왕국 일본의 자만이라는 특집 기사를 통해 세계 흐름을 보지 못하고, 국내 경쟁에만 몰두한 것이 몰락을 초래했다”고 분석했다. 당시 도시바는 NEC와 히타치에는 절대 져서는 안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인텔과 삼성전자가 무섭게 성장하고 있었지만 오랬동안 세계를 장악해왔던 일본 기업들은 소모적인 내부 경쟁에 빠져 이를 간과했다. 공교롭게 일본 경제가 1990년대 초반부터 잃어버린 20년에 접어들면서 디플레이션에 빠져들었고 동시에 일본 반도체 업체들은 순식간에 경쟁력을 잃기 작했다. 1992년 도시바는 삼성전자에 D램 시장 1위를 빼앗겼고, 이듬해에는 세계 반도체 시장 점유율에서 미국이 일본을 제치며 치고 나갔다. 20년이 넘게 지난 지난해 IHS의 세계 반도체 기업 매출 순위를 보면 10위 안에 든 일본 기업은 도시바(8위) 하나만 남았을 정도로 일본 기업들은 반도체 시장에서 존재감을 잃버렸다. 지난 20넌간 경쟁력을 잃어버린 일본 기업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뼈를 깎는 구조조정 뿐이었다. 1999년 NEC와 히타치는 D램 사업부를 통합해 엘피다를 설립했다. 2003년에는 미쓰비시전기 D램 사업까지 엘피다에 통합됐다. 하지만 엘피다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마이크론과의 치킨 게임 속에서 경쟁력을 점점 더 잃어갔다. 2012년 엘피다는 결국 파산하고, 미국 마이크론에 인수되며 일본 반도체 산업에 치욕을 남겼다. 엘피다 파산은 NEC, 히타치 등의 출신들이 서로 기술력만 앞세우고 융합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이유로 꼽힐 정도로 실패작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2003년부터 히타치와 미쓰비시 NEC는 비메모리 시스템LSI 사업을 순차적으로 통합해 르네사스일렉트로닉스를 출범시키며 재기를 위해 몸부림쳐왔다. 설상가상으로 유일한 낸드플래시로 일본 반도체 산업의 자존심을 지켜왔던 도시바는 지난해 부정회계가 들통나면서 백색가전과 센서 등 경쟁력이 없는 대부분 사업을 매각하는 뼈를 깎는 자구책을 마련해야 했다.
[도쿄 = 황형규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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