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 슬퍼요.
아침 하늘이 밝아오며는
달음박질 소리가 들려옵니다.
저녁노을이 사라질 때면
탕 탕 탕 탕 총소리가 들려옵니다.
아침 하늘과 저녁노을을
오빠와 언니들은 피로 물들였어요.
이 시는 4·19 혁명 당시에 초등학교 4학년 강명희 학생이 쓴 동시의 일부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56년 전인 1960년 4월19일 화요일. 이승만 정권이 자행한 3.15부정선거에 대항해 전국적으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시위대를 향한 경찰의 발포로 이날에만 서울에서 104명, 부산 13명, 광주 6명 등 총 123명이 사망했다.
앞서 1, 2대 중임 후에도 사사오입 개현으로 초대대통령 3선 제한까지 철폐해 12년 동안 장기집권에 성공한 이승만은 더 이상 대통령 선거에 나올 수 없었다. 하지만 이승만과 그가 총재로 있던 자유당은 장기 독재체제를 연장하고 부통령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 야당인사 살상, 입후보 등록의 폭력적 방해 등 각종 부정과 무리한 헌법 개정으로 이승만을 후보로 내세웠고, 선거 당일에는 4할 사전투표, 유령유권자 조작, 야당참관인 축출, 3-5인 공개투표, 부정개표 등 각종 만행을 저질렀다.
자유당의 이러한 부정 선거에 국민들의 분노와 증오가 들끓었다. 대구의 2·28시위부터 시작해 대전, 마산, 부산 등지에서 고등학생들을 중심으로 자유당 정권 퇴진을 외치는 항의 시위가 벌어졌고, 그런 와중에 마산상고 1학년이었던 김주열군은 3.15 부정선거에 항거하는 데모에 참가했다가 행방불명됐다. 김 군의 어머니는 아들의 실종 이후 수십 일간을 꼬박 한숨도 못 자며 아들의 생사여부와 흔적을 찾기 위해 이곳저곳을 미친 사람처럼 돌아다녔다고 한다.
그러던 중 4월 11일 오전 11시경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 눈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시신 한 구가 떠올랐다. 바로 학생복 차림을 한 김주열이었다.
죽음을 은폐하기 위해 마산 앞바다에 버린 이 시체가 떠오르자 사람들은 경악했고, 잠시 수그러들었던 시위는 더욱 격렬해져서 전국 각지로 퍼져나갔다.
18일 고려대학교 학생 3000여 명이 시위에 가담했다. 뒤이어 19일에는 국립 서울대학교의 전 학생들과 성균관·동국·경기·중앙·연세·홍익 대학생 등, 약 10만 명이 대대적인 시위를 감행했다.
이승만 정부는 시위진압을 위해 계엄령을 선포하고 경찰과 군대를 동원해 총격을 개시했고, 시위 대학생들 가운데 수십 명의 사망자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다. 하지만 결국 이승만은 버티지 못하고 하야성명을 발표한 뒤, 하와이로 망명했다.
이 사건은 3.15부정선거에 반발해 학생들이 앞장서 일으킨 국민적 항의 시위였다.
12년 동안의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주의의 새 역사를 열었다는 점에서 역사에서는 이 항쟁을 ‘4.19 혁명이라고 부른다.
[디지털뉴스국 김예린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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