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색 벽에는 검은 소녀가 ‘붙어 있다. 순정만화에서 막 튀어나온 것 같은 소녀는 큰 눈망울로 관객과 시선을 맞춘다. 아름답지만 음울한 이 소녀의 정체는 그림이 아니라 스티커다.
이 ‘스티커 예술의 작가는 박주희씨(37). 미국 뉴욕에 위치한 미술대학 프랫 인스티튜드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한 박씨는 글로벌 광고대행사인 오길비앤매더(이하 오길비) 뉴욕 본사에서 근무하고 있다. 그녀는 ‘스티키몽거란 이름으로 브루클린에서 활동하는 미술작가이기도 하다. 해외에서 취업과 작가활동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셈이다.
박씨는 지난 1월부터 서울 송파구 석촌호수 인근에 위치한 에브리데이몬데이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다. 다음달 27일까지 열리는 이번 전시회는 한국에서 연 첫 번째 개인전이다. 박씨는 4년 만에 한국에 왔다. 뉴욕에서 몇 차례 전시회를 열었는데, 그때 이자영 에브리데이몬데이 대표와 인연이 닿아서 한국에서 작품을 선보일 기회를 갖게 됐다”고 말했다.
그녀의 작업 방식은 독특하다. 손으로 그린 그림을 디지털로 작업해 직접 접착시트 컷팅 기계로 출력, 벽에 붙이는 과정을 거쳐 작품이 만들어진다.
뉴욕 거리를 걷다가 쇼윈도에 붙어있는 이미지에 매료됐어요. 이걸 이용해보자 싶어서 저렴한 DIY 기계를 사서 직접 조립해서 출력해보기 시작했죠. 모터를 태워먹기도 하면서 혼자 공부했어요.”
소녀라는 주제에 천착하는 이유에 대해 박씨는 한국에서의 여중, 여고 시절 경험들이 바탕이 됐다”고 답했다. 그녀는 교칙이 엄격한 학교를 다녔다. 머리나 복장은 물론이고, 가방도 정해진 것만 들고 다녀야 했을 정도였다. 아름다운 추억보단 통제와 적막이 먼저 떠오를 정도”라며 그 감정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작품 때문에 밤을 새기도 일쑤라는 그녀에게 직장인과 작가로서의 삶이 양립 가능한지 물었다. 박씨는 디지털 작업을 하면서도 아날로그 작업의 끈을 놓지 않듯이, 어느 한쪽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며 오히려 부족한 시간 때문에 그 시간을 좀 더 몰입해서 쓸 수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녀는 말은 이렇게 해도 작품 욕심에 칼퇴근할 때가 많다. 소리 없이 퇴근한다고 회사에서 별명이 ‘닌자다”라며 웃었다.
외국계 회사에 일하는 장점으로 그는 ‘철저한 개인주의‘를 꼽았다. 나쁘게 말하면 남 일에 관심이 없는 것이지만 그런 점이 눈치 보지 않고 자신을 위해 투자할 수 있는 기반이 됐다. 돌아온 결과는 ‘인정이었다. 박씨는 지난해 전시회 때문에 회의 참석이 어려울 것 같다고 하니까, 상사 한 분이 ‘그런 일을 하고 있는 줄 몰랐다며 회사에서 운영하는 웹 사이트에 ‘이달의 아티스트라는 글을 써줬다”고 했다.
박씨는 한국에도 아트토이·서브컬처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선보일 수 있는 장(場)이 많이 생겨나고, SNS를 통해서 자신을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생긴 것 같아서 감회가 새롭다”고 했다. 해외 활동을 꿈꾸는 신진 작가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냐는 질문에 그녀는 나 역시 신인이라 조언이라는 말은 조심스럽다”며 조심스레 자신의 경험담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교환학생 당시 경험했던 뉴욕 아트마켓의 다양성에 몸을 던져보잔 생각에 모은 돈을 털어서 미국으로 왔어요. 하지만 데뷔하고 싶다는 막연한 희망에 기대서 무작정 떠난 건 아니에요. 오히려 낯선 곳에서 더 많이 노력해야 하고, 난관이 더 많을 거라는 걸 염두에 두고 철저히 조사했고 준비했습니다. ‘도전은 과감히, 준비는 열심히죠.”
[홍성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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