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기고] 119, 반복 학습의 힘
입력 2015-12-28 16:33  | 수정 2015-12-29 12:04

- 서울중부소방서 예방과장 정진항

[장면 1] 미국의 한 중학교 체육수업 시간.

14살 남학생 넬슨 군이 친구들과 체육관 농구코트 위를 달리며 몸을 풀고 있다. 코트를 몇 바퀴 달리던 넬슨 군이 갑자기 달리던 속도를 줄이더니, 천천히 대열에서 이탈한다. 다리가 풀린 듯 크게 흔들리던 그는 앞으로 고꾸라지듯 쓰러지고 만다. 뒤따르던 친구는 대수롭지 않게 넬슨 군을 지나쳐 뛰어갔고, 멀리서 이를 발견한 체육교사가 달려온다. 때마침 체육관을 방문했던 교감 선셍님이 달려와 몸 상태를 살펴본다.
다행히 교감 선생님은 며칠 전 심폐소생술 교육에 참가했었기에 환자 상태를 파악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곧바로 이 분은 넬슨 군의 호흡이 완전히 끊겼음을 느꼈고, 곧바로 심폐소생술을 실시했다. 신고 10여 분만에 도착한 구급대원에 의해 넬슨 군은 병원으로 이송되고, 소중한 생명을 되찾게 된다. 넬슨 군은 자신에게 유전적 심장질환이 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된다.

[장면 2] 서울 강서구 내발산동 한 아파트 앞,

10살 된 이수빈 양이 어머니와 함께 장을 보러 나왔다가 길가에서 살려달라”는 다급한 외침 소리를 듣게 된다. 수빈 양은 반사적으로 어머니와 함께 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빠르게 이동한다. 그녀가 발견한 것은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 50대의 한 아저씨. 이미 열댓 명의 어른들이 주변에 모여 있었지만, 다들 어찌할 바를 몰라 발을 동동 구른다.
하지만, 수빈 양은 불과 4시간 전 소방서에서 심폐소생술을 배운 상황. 그래서 주저하지 않고 아저씨 옆으로 다가가 상태를 살펴본다. 같은 날 함께 심폐소생술을 배웠던 어머니가 먼저 환자의 턱을 들어 기도를 확보했다. 이어 수빈 양이 능숙하게 환자의 가슴에 심폐소생술을 실시했다. 어머니는 혈액순환이 잘 되도록 신발과 양말을 벗겨냈고, 잠시 뒤 ‘푸하는 소리와 함께 의식을 회복한 환자는 병원으로 이송되어 아찔한 순간을 벗어났다.


[장면 3] 서울 성북구의 한 솜틀집,

솜틀집에 불이 났다는 신고를 받은 119소방대원들이 서둘러 화재현장으로 달려간다. 그 곳에 도착한 119대원들은 두 가지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란다. 첫째는 작은 가게 규모에 비해 불길이 엄청나게 컸는 점이고, 둘째는 솜틀집 주인이 주변 상점에서 구해온 소화기들을 통째로 불길 속으로 던져 넣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불길 진압 후 내부를 살펴보니 시꺼멓게 그을린 소화기가 무려 10여개나 뒹굴고 있다. 망연자실한 솜틀집 주인에게 소방관이 왜 소화기를 통째로 집어 던졌는지 이유를 물었다. ‘나도 몰라요. 아무 생각도 안 나고... 그저 다급한 마음에 소화기가 불 속에서 터지라고 던졌어요. 당시 소방서 진압팀장이었던 필자가 경험한 10년도 더 지난 일이다.

환자가 쓰러진 후 실시하는 심폐소생술, 그리고 화재시 바로 사용하는 소화기의 능력은 참으로 대단하다. 가슴을 압박하는 작은 몸짓만으로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고, 소화기에서 뿜어지는 분말가루 소량으로도 큰 불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국민 대부분은 신속한 심폐소생술과 소화기 사용의 중요성을 충분히 알고 있다. 문제는 주변에서 누군가 쓰러지거나 화재가 발생했을 때 선뜻 심폐소생술을 하거나 소화기를 사용하려는 적극성이 부족하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TV나 영화, 소방안전교육 등을 통해 심폐소생술 요령과 소화기 사용법을 배웠음에도 막상 사고가 일어났을 때 곧바로 대처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반복학습이 미흡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수십 년간 영어를 배우고 인사법 정도는 가능한 사람들이 막상 외국인을 만나면 괜히 쭈뼛거리는 상황과 비슷하다. 틀리면 어떡하지, 이 나이에 무슨 창피를 당하려고... 이런 걱정이 앞서는 순간, 자신감은 급격히 위축된다. 그래서 심폐소생술과 소화기 사용법을 알고 있더라도 막상 맞닥뜨리면 선뜻 나설 용기가 나지 않는 것이다.

위급한 상황에서 안전을 지켜줄 수 있는 것들로는 심폐소생술과 소화기, 소화전과 완강기 등의 기초소방시설이 있다. 활용법이 간단해 성인이면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잊혀지기도 쉽다. 필자 역시 그 사건 이후로 수시로 불에 그을려 내던져진 소화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다급해지면 너무도 쉬운 소화기 사용법조차 기억을 못하는가 보다.

일상의 안전을 지켜줄 기술들은 제대로 배워야하지만 자주 익히는 것 역시 중요하다. 앞서 언급한 미국 중학교 교감 선생님과 이수빈 양의 사례 모두 심폐소생술을 덕분에 귀중한 생명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 솜틀집 주인은 소화기 사용법을 배웠지만, 활용법도 모르고 언제 배웠는지 기억조차 하지 못했다.

요즘 시중에 저렴한 가격으로 구입해 수시로 익힐 수 있는 안전교육장비들이 판매되고 있다. 얼마 전 나온 ‘소형 심폐소생술 실습장비 역시 적은 투자로 다양한 학습효과를 얻을 수 있다. 가정이나 직장에서 짬을 내어 연습한다면 누구나 자신있게 위기 상황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외국인을 만나면 자신감을 갖는게 중요하듯 모든 국민이 위기의 순간을 잘 헤쳐나올 수 있도록 대응법을 빨리 익히는 것이 119소방대원들의 한결같은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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