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신호면 서야 합니다. 빈대를 잡기 위해서라면 초가삼간도 태우세요."
품질 우선 경영철학으로 국내 전자산업의 격을 한 단계 높인 것으로 평가받는 이헌조 전 LG전자 회장이 7일 숙환으로 별세했습니다. 향년 83세.
이 전 회장은 LG전자 전신인 금성사 창립 멤버입니다. 1957년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해 락희화학공업사(현 LG화학)에 입사해 LG와 인연을 맺은 뒤 구자경 명예회장 신임을 받으며 최고경영자(CEO) 자리에까지 올랐습니다. 구 명예회장은 계열사 사장들이 결재를 받으러 오면 "이헌조와 먼저 상의해봤느냐"고 할 정도로 신임이 두터웠습니다. 후배 경영자들은 이 전 회장에 대해 '마지막 한학자'라는 표현을 씁니다. 원칙을 중시한 조선시대 양반 같지만 후배들에게는 한없이 자상한 아버지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직원을 아끼는 그의 생각은 LG전자만의 고유 용어인 '노경(勞經) 관계' 창시로 이어졌습니다. 노사(勞使)라는 말이 갖는 대립적이고 수직적인 의미가 아닌, 상호 존중과 신뢰를 바탕으로 노(勞)와 경(經)이 화합과 상생의 가치를 함께 창출해야 한다고 본 것입니다.
그는 평소에 "좋은 경영자가 되는 비결이 '논어'에 다 있어 CEO 시절 어려울 때마다 힘이 됐다"며 "마음속으로 '논어' 구절을 되새길 때마다 항상 또 다른 맛이 느껴지곤 했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논어'에서 애용한 구절은 '소인은 이익에 밝은데 군자는 옳고 그른 것에 밝다(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입니다.
1998년 LG인화원장을 끝으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이 전 회장은 2010년과 2012년 두 차례에 걸쳐 사재 80억여 원을 한국 실학연구 단체인 실시학사에 기부했습니다. 실시학사는 이후 공익재단으로 전환해 이 전 회장 호를 딴 '모하(慕何)실학논문상'을 제정해 2011년부터 시상해오고 있습니다. 빈소는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으며 유족으로는 부인 권병현 씨가 있습니다. 장례식은 LG전자 회사장으로 진행됩니다. (02)2072-20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