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결단력 있고 선 굵은 리더였다" 참모들이 회상하는 YS
입력 2015-11-22 16:43 

김영삼(YS) 전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던 인사들은 그를 결단력 있고 선이 굵은 리더로 기억했다.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척결하고 금융실명제를 전격적으로 실시하면서 기득권 세력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지만 타협하지 않고 밀고 나갔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또한 민주화 투쟁을 이끈 YS는 직관적으로 결정을 내리고 특유의 카리스마로 조직을 이끌어 갔다는 게 회고했다
◆직관적으로 정치적 결단력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은 정치적 결단력이 있었다. 흔히 공부를 안 해서 지식이 없다는 것이든지 아니면 그 반대든지와 상관없이 정치적 판단력은 다른 문제”라며 YS는 결단의 시기에 말을 적게하고 좋은 직관력으로 결단을 내렸다”고 말했다.
남 전 장관은 나와 노동 현안에서 몇 개의 이견이 있었다. 그래도 그 양반은 개혁에 대한 이해가 있었다”며 다만 견해차가 나는 것은 그 분이 ‘타이밍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장관으로서 개혁안을 내놓으면 그 양반은 개혁안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았고 오로지 적절한 타이밍이 언제인지를 생각했다”고 전했다..
이원종 전 청와대 정무수석도 비슷한 내용의 회고를 했다. 그는 세계화 정책이나 OECD 가입은 너무 이르다는 등의 여러가지 말이 많았지만 세계적인 추세였다”며 세계 경쟁의 대열에 뛰어들어야 한수 위의 상대와 붙어서 배우는 게 있고 남는 게 있지 않겠냐”고 말했다. 남 장관은 주무장관으로서 YS의 정치적 판단에 대해서도 평가했다.
공로명 전 외무장관은 전직 대통령 처벌과 조선총독부 건물 해제 등도 김 전 대통령의 진취적이고 돌파력있는 정치 스타일을 그대로 반영한다”며 일단 본인 생각이 서고 나면 좌고우면하지 않고 힘있게 밀고 나갔다”고 평가했다. 그는 대통령 취임 전 여당 대표로 소련을 방문해 국제경제연구소를 방문하고 한국 지도자로서 처음으로 미하엘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을 면담했던 일도 있었다”며 대통령 재임중에는 주목받지 못하지만 한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중남미를 순방했는데 우리나라의 유엔 가입 등과 관련해 우리 나라의 ‘표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그동안 한국 대통령이 쉽게 방문하지 못하던 곳을 처음 가셨다”고 강조했다.

◆선 굵은 스타일
이 전 수석은 하나회 정리라든지 금융실명제, 공직자 재산등록 공개는 기득권자의 거센 반발을 돌파하고 추진됐다”며 자신의 기득권을 화끈하게 내려놓은 지방선거가 제일 중요한 것이었다”고 평가했다. 이 전 수석은 1995년도 지방선거는 안해도 되는 것이었고 선거는 깨끗했지만 여당 입장에서 선거 결과는 망했다”고 말했다. 한일 관계도 YS 특유의 스타일이 나타났다.
공 전 장관은 당시 일본 유력 정치인이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이야기한 것에 대해서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겠다”라고 말한 것이 보도가 돼서 한일관계가 경색됐었다”며 기본적으로 한일관계라는 것이 어렵다. 국민감정과 외교 사이에서 따로는 시계추의 진폭이 매우 크지만 외교를 펼치면서도 선이 매우 굵은 스타일로 과거 하시모토 일본 수상과 제주도에서 한일 정상회담을 했을때 당시 제주도 특산 명품 소주를 함께 마시면서 하시모토 총리와 격의없이 ‘형님, 아우 하면서 호형호제 하던 일화도 생각이 난다”고 전했다.
남 전 장관은 금융실명제 추진은 한마디로 용감했다”며 특히 잘한 것은 하나회 척결이다. 군부 숙정은 지금 생각해봐도 정치적 의미가 크다”고 강조했다. 그는 만약 YS가 하나회를 묵인하거나 타협을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YS의 숙정이 없었더라면 보수적인 YS정부에서는 별일이 없었겠지만 DJ정부나 노무현정부에서 무슨 사달이 났을지 모를 일”이라고 평가했다.
이수성 전 총리는 마음속에서 우러 나오는 애국자였다”며 늘 가난하고 어렵고 외로운 사람들을 늘 마음에 두었다”고 밝혔다. 이어 부당한 이익을 취하는 부패사회 척결을 위해 노력했다”며 역대 어떤 대통령에 비해서도 못하지 않은 훌륭한 대통령이었다”고 평가했다.
◆의회주의자로 문민화의 기틀 마련
남 전 장관은 YS는 본래 다수파 정치를 한 사람이다. 경상도와 영남이라는 다수를 배경으로 했고 보수 세력이라는 또 하나의 다수를 정치적 배경으로 했다”며 반면 DJ는 호남이라는 소수와 진보라는 색깔을 띠고 있다. DJ는 소수파를, YS는 다수파를 배경으로 출발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가장 큰 차이가 있다”고 전제했다.이어 그럼에도 YS의 민주투쟁은 철저했다. 민주투쟁에서 다수파, 소수파 관계 없이 두 분 모두 훌륭한 분들”이라고 말했다. 그는 YS와 DJ 정권이 순서대로 탄생한것을 신의 섭리라고 표현했다. 남 전 장관은 정치사의 전체 흐름으로 보면 뭐랄까. ‘신의 섭리가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군사·권위적 정권이 타협적인 성향의 YS정부로, 이어 개혁적인 DJ정부로 이어진 건 대단히 잘 된 일이다. 단계적으로 YS가 집권을 했기에 DJ의 집권과 안정적 통치가 가능했다. YS단계 없이 바로 호남·소수파를 배경으로 하는 DJ의 개혁성향이 출현했다면 결코 국정운영이 순탄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전 수석은 YS가 문민정부의 기반을 닦았기 때문에. 지금 현재 몇번에 걸쳐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뤄냈다”고 말했다. 그는 그는 철저한 의회주의자였고 그 바탕은 민주주의 의식이었다. 평생을 민주화 투쟁했다. 정권교체가 평화롭게 이뤄질 수 있도록 기반을 다졌다. 군의 정치적 영향력을 제거해버렸다”고 평했다.
◆1차 북핵 위기에서 북·미 충돌 모면
YS는 1차 북핵 위기라는 커다란 외교적 난제를 겪었다. 이 전 수석은 취임사에는 민족이상 우선하는 가치는 없다고 말했고 장기수 이인모를 석방해 북한으로 보내는 조치를 취했다”며 그런데 북한이 장기수를 받은 뒤 NPT(핵확산금지조약)를 탈퇴하겠다고 하며 문제가 생겼다”고 회고했다. 그는 원래는 미국과 북한간 제네바 협상을 통해서 해결하는 것이었는데 (북한이) 약속을 안지키니 소용이 없었다”고 말했다. 이 전 총리도 영변 핵시설을 미국이 폭격하려고 했고 북한의 장사정포와 단거리 미사일이 전부 우리를 겨냥하고 있었다”며 미국이 공격을 했다면 대한민국과 북한이 다 망하는 상황이었는데 그것(미국의 폭격)을 끝까지 거부한 게 우리 대통령이었다”고 회고했다
[정리 =안두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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