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강, 건설, 석유화학 등 대기업 주력업종에서 대형 부실 우려가 높아지는 가운데 정작 기업 구조조정 조타수 역할을 해야 할 산업은행 등 국책은행들의 역량은 크게 뒤쳐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선제적 구조조정에 나서야할 국책은행들이 오히려 좀비기업(한계기업)에 자금을 추가 지원하며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를 계속하는 바람에 부실만 더 키우는 사례가 빈번하게 계속됐다는 얘기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이 11일 공개한 ‘부실 대기업 구조조정에 국책은행이 미치는 영향 보고서에 따르면 산업은행, 기업은행, 수출입은행 등 국책은행은 일반은행보다 구조조정을 평균 2.5년 지연시킨 것으로 나타났다. KDI는 2008년 이후 워크아웃을 개시한 39개 상장사를 분석해 이 같은 연구 결과를 도출했다. 일반은행이 주채권은행인 기업들의 경우 ‘좀비기업 상태에 돌입하기 평균 1.2년 전 선제적으로 워크아웃에 들어간 것과는 대조되는 결과다.
수시로 금융당국 감사를 받고 책임소재가 분명한 일반은행들이 부실 기업이 좀비기업 상태에 이르기 전에 워크아웃을 선택해 추가 부실이 커지는 것을 막았다는 얘기다.
반면 국책은행은 오히려 좀비기업이 된 뒤에야 워크아웃을 신청했다. 한마디로 암 환자로 치면 말기에 이른 뒤에야 수술실로 보내 치료를 받게 했다는 분석이다.
KDI측은 국책은행이 주거래은행인 기업들의 경우 좀비기업이 된 뒤 평균 1.3년 뒤에야 워크아웃에 들어갔다.
남창우 KDI 연구위원은 국책은행은 부실이 감지되기 시작한 기업에 오히려 자금 지원을 확대하면서 워크아웃 개시 시점을 늦췄다”며 국책은행이 기업 부실에 대해 선제적인 구조조정을 요구하기보다는 기업 회생에 대한 낙관적 기대에 의존해 구조조정을 지체했다”고 꼬집었다.
국책은행의 안이한 대응은 좀비기업이 워크아웃에 들어간 다음에도 마찬가지였다. 워크아웃기업들의 경우 선제적으로 자산을 매각하고 인력을 구조조정해서 기업을 살려야 하는 데도 이를 게을리했다는 것이다.
KDI에 따르면 일반은행이 주채권은행인 기업은 워크아웃에 들어가면 3년 이내에 70% 가량 자산을 매각했다. 반면 국책은행이 주채권은행이면 자산을 매각한 비율이 33%에 그쳐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국책은행이 주거래은행인 기업은 인력 구조조정도 소극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워크아웃에 들어가도 일반은행이 주거래은행일 때보다 3년 안에 종업원을 20% 구조조정한 비율이 절반 수준에 그쳤다.
정대희 KDI 연구위원은 분석 결과 일반은행이 주채권은행이면 국책은행 보다 구조조정 성과가 5% 가량 높이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중소기업보다 대기업에 대한 도덕적 해이가 더 심각하다는 점이다. 부실화된 대기업들이 국책은행에 의존해 구조조정을 미루면서 경제 전체에 위험을 키우고 있다는 것이다.
KDI가 2010년 이후 부실기업이 보유한 자산을 시계열로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좀비기업이 보유한 자산 비중은 2010년 6.2%에서 지난해 10.2%로 늘었다. 특히 이 기간 중소기업이 보유한 자산 비중은 2010년 3.0%에서 지난해 3.3%로 늘어나는데 그쳤지만, 대기업은 2010년 3.2%에서 지난해 6.9%로 두배 넘게 늘었다.
KDI에 따르면 대기업에 대한 국책은행 금융지원은 2010년 이후 계속 증가하는 가운데 좀비기업에 대한 지원 비중도 확대됐다. 또한 국책은행에서 부실 기업이 빌린 총 차입금 가운데 이른바 ‘좀비 대기업 비중은 2010년 4.6%에서 지난해 12.4%로 급증했다.
KDI 관계자는 국책은행이 채권단의 이해상충 문제에서 자유로운 독립된 기업구조조정회사에 부실자산을 매각하도록 해서 기업구조조정이 시장에서 진행되도록 유도할 필요가 있다”며 엄격한 기업실사를 통해 워크아웃이 어렵다고 판단되는 부실기업을 신속하게 법원의 회생정리 절차로 유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규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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