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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이유 논란에 대한 ‘스물셋’ 女작가의 반박
입력 2015-11-10 15:06  | 수정 2015-11-10 17:35
[매일경제 스타투데이=기고] 아이유와 그의 노래 '제제'를 향한 논란이 연일 계속되고 있다. 아이유를 십자가에 걸어야 한다는 아우성이다. '표현의 다양성은 지켜져야 한다'고 말하는 이는 인터넷 광장에서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다.
이 글이 그 모든 반응에 대한 대답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아이들의 삶을 쓰는 작가로서 아이유와 제제 논란에 대한 뼈 아픈 반박을 해보고 싶다.
▶ 가장 논란이 되는 '제제' 가사
'넌 아주 순진해 그러나 분명 교활하지/ 어린아이처럼 투명한 듯해도 어딘가는 더러워'
초등학생 시절, 나는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를 영문으로 읽었다. 영어 공부를 하기 위해 읽었던 책이니 단어 암기를 열심히 했다. 그 중 내게 가장 강렬하게 남은 단어는 앞 부분에 나왔던 'Precocious'(조숙한)다. 
제제는 미리 어른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을 작가는 그토록 초반에 묘사했다. 어른이 되는 과정을 두고 우리는 흔히 '때가 묻었다'고 표현한다. 즉, '더러워'는 아이유의 언어 표현 방식일 뿐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를 읽은 독자에게 전혀 낯선 시선은 아니다.
나의 소설 ‘파도는 바다와 다르지 않다 2부 배경 중 이명산(利明山)이라는 가상의 장소에 위치한 보육원이 있다. 그곳에서는 중학생이 성관계를 맺기도 하고, 따돌림을 겪는 아이는 집단 폭행을 당하기도 한다.

투명한 것처럼 보이는 아이들의 내면은 일그러져 있고, 소리 없이 신음하는 데 익숙하다. 그 소설의 작가로서 아이유와 제제 논란이 대단히 불편했던 이유가 있다. 아이유가 추억 속 ‘순수했던 제제를 더럽혔다고 하는 사람들의 시선 때문이다.
제제의 '아이다움'을 지켜주고 싶어하는 독자들에게 묻고 싶다. '아이답다'란 과연 무엇인가?
'아이답다'는 철저하게 어른의 시선으로 아이를 대상화했을 때 가능한 형용사다. 아이를 '아이답다'고 표현하는 것은 그 아이가 '내가 바라는 대로' 순진하다는 의미를 전제한다. 제제가 실존 인물을 대상으로 만들어진 캐릭터임을 감안하면 이 폭력적인 관점의 잔인함은 배가 된다. 
소설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본문을 살펴보자. 
"The funny thing was, she had a man's mustache. That must have been why she was the principal."(웃긴 건 그 여자에게는 남자들이나 갖고 있을 법한 콧수염이 있었어. 그게 그 여자가 교장이 된 이유였을거야.)
소설 속 제제는 남녀간 고정된 성 역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 상대를 외모로 조롱하기도 한다. 그가 사고의 미숙함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 인간이기에 그렇다. 아이유의 제제는 원작의 주인공을 충실히 표현하되, 그 양면성에 주목했다.
그러나 이것이 제제를 섣불리 '보호'하려고 드는 대중의 심기를 거슬렀다. 본 기고 글은 대중에게 두 가지 질문을 던지는 것을 목표로 한다.
첫째, 아이유는 왜 당신과 같은 눈으로 제제를 봐야 하는가? 
둘째, 아이유는 왜 당신이 바라는 예술을 해야 하는가?
이 문제에 대해 대중은 '예술의 윤리성'을 언급할 것이다. 이 문제는 뒤에 가서 자세히 논박하도록 하겠다.
셋째, 어떻게 가정 폭력 피해자인 제제를 '그렇게' 표현할 수 있는가? 
'당장에 머리 위엔 햇살을 띄우지만/ 어렴풋이 보이는 너의 속은 먹구름과 닿아있네'(아이유 '제제 노랫말)
'가정 폭력의 피해자를 그렇게 그려서는 안 된다'는 시선 속 '피해자'는 언제까지나 동정의 대상으로 남아야 한다는 전제가 있다. 그들은 상처받고 연약한 존재이므로 '피해자'가 아닌 타자는 그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한 때 가정폭력 피해자였던 나는 이 시선이 불쾌하다. 폭력 사건의 피해자는 교통사고를 당하듯 인생의 어느 부분에서 가해자를 만난다. 그리고 그가 겪은 것이 어떤 종류의 폭력이든 그는 그 이후에도 인간으로서 대우를 받을 권리를 갖고 있다.
너무나 아름답지만 왠지 모르게 불쾌한 냄새를 풍기는 꽃을 상상해보자. 악취가 나는 그 꽃이 가엾다고 해서 '그 꽃은 냄새가 나지 않는다'고 부정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혹시 보호라는 미명 하에 그 꽃의 정체성의 일부를 도려내는 실수를 저지르는 건 아닐까.
아이유가 만든 제제가 원작의 제제를 다치게 하지 않길 바라는 대중의 걱정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작가의 삶을 담은 만큼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는 독자가 캐릭터에 공감할 수 있는 통로가 넓다. 그가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이라는 인식을 독자가 갖고 있어서다.
바로 그러한 탓에, 제제에게 섣불리 ‘피해자의 멍에를 얹기 전 독자는 이 점을 고려해야 한다. 선과 악의 일체성 속에서 자아를 성립하는 인간의 총체적 모습을 고려해주는 것이 그를 향해 타인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배려다. 
가정 폭력의 피해자이기에 제제를 악인으로 보지 말라는 시선은 너무나 편협하다. 그것이 번역가의 시선이든, 누구의 시선이든 관계 없이 그렇다. 인간의 선과 악은 반드시 하나의 통로에서 출발하며, 결코 분리되어 있는 개념이 아니다.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제제는 선한 만큼 악하고, 겸손한 만큼 교활할 뿐이다. 
▶ 망사스타킹을 신은 제제
아주 어렸을 때의 일이다. 나는 어머니의 브래지어를 착용하고고 거울 앞에 서 본 적이 있다. 그 때의 나는 그것이 과연 나를 아름답게 만들어줄 지, 아닐 지에 대해 고민했다. 나는 아버지에게 사랑 받는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을 보았고, 과연 아버지를 비롯한 타인이 그런 나를 어떻게 봐줄 지 생각했다. 열 살도 되지 않은 나는 타인에게 ‘아름답게 보이기를 원하는 욕구가 있었다. 나는 자문했다. 나는 왜 아름답게 보이고 싶어했을까?
당시 나는 타자의 시선 속에서 자아를 성립하고 있었다. 그 시절 나는 행위의 선과 악을 구분하지 않았고, 스스로를 조숙하거나 영악하다고 인지하지 않았다. 다만 내가 아름다워야 사랑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자각하고 있었다.
아이유의 ‘스물셋 앨범 재킷 속 제제는 망사스타킹을 신고 누군가를 유혹하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 제제를, 그 어린 시절의 나와 같은 상태에 놓여있다고 나는 해석했다. 이것을 순수하지 않음의 예로 보는 것은 타자의 시선 속에서 그 행위가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또 다시 당신은 그에게 '아이다울 것'을 강요하고 있다. 과연 제제의 시선 속에서도 그것은 아이답지 않은 행동이었을까? 망사스타킹을 신었든, 신지 않았든 제제는 과연 자신을 조숙하고, 영악하고, 악의에 차 있는 못된 어린아이, 혹은 선하고 아이답고 순진한 아이라고 생각했을까? 소설 속 캐릭터를 어떤 종류의 형용사로 고정시키려는 모든 시도는 그의 인간성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폭력은 아닐 지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더불어 이 지점에서 '소아성애'라는 단어가 등장했다. 아이유가 표현한 제제가 소아성애를 장려하고 있으며, ‘서양에서는 특히 이 문제를 엄격하게 다룬다는 것이다.
덴마크 출신의 감독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 '님포매니악 1'에 한 장면이 있다. 미취학 아동 시절의 주인공 ‘조는 친구 H와 화장실에서 물을 틀어놓고 바닥에 엎드려서 자위를 한다. 10대가 된 그녀는 기차에서 얼마나 많은 남자들과 잘 수 있는 지 H와 내기를 한다.
성적인 표현을 배제한 채 소아와의 성애를 그린 작품도 있다. 뤽 베송 감독의 영화 '레옹'에서 마틸다는 레옹에게, ‘뱃속에 나비가 춤추는 것 같다고 사랑을 고백한다. 죽음 앞에 선 레옹은 그녀의 사랑을 받아주겠다고 선언한다. 이렇듯 성인 이전 단계의 인간이 자신의 성을 탐구하거나 혹은 소아와 성인의 사랑을 담은 작품은 예술계에 끊임없이 등장한다.
이 모든 장면이 소아성애를 장려하기 위해 만들어졌거나, 소아성애를 장려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그보다는 그 캐릭터에 대한 심도 있는 고찰이 먼저 요구되어야 한다.
아이유의 시선 속 제제는 자신의 성을 탐구하고 있는 상태, 또는 스스로를 성적으로 대상화 시켜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고 나는 해석했다.
아이유가 제제를 성적 대상화했다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의 눈에 반영된 자아를 왜곡시킴으로써 그가 처한 불행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어린아이의 시도를 나는 그 이미지에서 볼 수 있었다. 
충분히 그렇게 해석될 여지가 있다.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인간은 자아를 파괴할 권리 앞에 순응한다. 원작 속 제제가 아닌, 아이유의 음악 속 제제를 보고 나는 바로 그러한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아울러 남자와 여자가 뒤바뀐다고 나의 관점이 달라지지 않는다. 여성과 남성을 막론하고 자신의 성을 탐구해볼 권리, 자신의 성을 마음대로 이용할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다. 아이유의 표현 속 제제가 자신의 성을 탐구하고 타자의 시선 속 자아에 대한 개념을 완성시켜가고 있다고 '내가' 해석한 만큼, 그 대상의 성별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타인의 정원에서 꽃을 꺾는 행위에 대한 자기 변명으로 제제는 '그것은 신의 것이므로 내게는 꽃을 꺾을 권리가 있다'는 깜찍한 논리를 펼쳤다. 제제도,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도 결국 신의 것이라면 누구든 그것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권리를 부정당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 밍기뉴의 관점 
'제제, 어서 나무에 올라와/ 잎사귀에 입을 맞춰/ 장난치면 못써/ 나무를 아프게 하면 못써 못써'
밍기뉴에 대한 관점에서 이 가사가 쓰였다는 사실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음은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중 본문이다. 
"But there's  one, Minguinho, there's one car nobody has the courage to catch. You know which one it is? It's that big car of the Portuguese, Manuel Valadares. Did you ever hear such an ugly name as that? Manuel Valadares...."(그렇지만 밍기뉴, 하나 있어. 누구도 잡을 용기를 내지 못하는 차가 말이야. 뭔지 알아? 그 포르투갈 사람, 마뉴엘 발라다스의 큰 차야. 그런 괴상한 이름 들어본 적 있어? 마뉴엘 발라다스...)
"It is. But I'm thinking of something.."(그러네. 그런데 난 좀 다른 걸 생각하고 있어...)
"Do you think I don't know what you are thinking? I know. But not now. I have to practice more.... Before I risk it."(네가 무슨 생각하는 지 내가 모를 것 같아? 안다고. 근데 지금은 아냐. 조금 더 연습할 필요가 있어.... 위험을 감수하기 전에는.)
제제와 밍기뉴의 이 대화는 두 사람 만의 은밀한 생각의 교류를 독자로 하여금 상상하게 한다. 더 나아가, 제제와 밍기뉴의 관계의 본질을 두고도 독자는 마음껏 상상할 권리를 갖는다. 특히 밍기뉴는 인간성을 지닌 비(非) 인간 캐릭터다.
작가가 벌린 이러한 틈 속에서, 나무의 표상 뒤에 숨겨진 은밀한 암시를 아이유는 충분히 더듬어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곡이 밍기뉴의 관점에서 쓰여졌다 해서 이상할 게 없다. 오히려 소설 속 인물의 관점을 빌려 가사를 썼다는 점이 내게는 대단히 흥미로운 시도로 보였다.
▶ 예술의 윤리?
먼저, 대단히 확고한 어투로 '예술은 윤리의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세 가지 질문을 해보고 싶다. 
첫째, 예술이란 무엇인가?
둘째, 윤리란 무엇인가?
셋째, 예술은 반드시 윤리적이어야 하는가? 
칸트는 미(美)란 주관적이라고 정의했다. 형식, 즉 객관적 체계가 지배하는 음악은 근대적 이상의 산물이다. 아이유의 음악이 좋은 지 나쁜 지에 대한 객관적 기준은 현대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가 말 한대로 제제는 '해석의 여지가 많은' 음악이다. 어떤 이는 아이유의 제제 속 화자를 성관계의 상대, 혹은 아이의 순수한 악의를 받아주는 친구라고 볼 수 있다. '표현의 자유', '창작의 자유', '수용자의 열린 자세'는 예술 작품의 좋고 나쁨을 따질 수 없는 객관적 기준의 부재에서 온다.
예술과 윤리는 대단히 복잡한 관계에 놓여 있다. 두 영역의 각각의 정의가 서로 상충하지 말아야 하면서 고유한 성질을 인정하되, 어느 것 하나도 다른 것을 지배하지 못한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예술가의 윤리(Moral)가 과연 일반적 의미의 도덕과 태환될 수 있는 지에 대한 논의가 선행되어야 한다. 
당신의 정의를 따른다면, 살인도 예술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예술에 대한 몰이해가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예술은 ‘자위행위가 아니다. 비평가와 대중을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하는 예술가조차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자신의 작품을 완전히 소외시킬 수는 없다.
자기만족을 위해 하는 행위가 예술의 정의라면 예술학교의 존재는 재질문되어야 마땅하며, 우리는 예술을 향유할 노력조차 할 필요가 없다. 예술가는 끊임없이 보이지 않는 타자에게서 벗어나고자 노력하는 동시에 나의 시선에 왜곡된 대상이 '왜곡되지 않았다'고 타자에게 설득하는 것을 과업으로 삼는다.
그렇기에 인간의 의지로 탄생한 예술은 인류의 모든 움직임과 마찬가지로 '생산'을 조건으로 갖는다.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예술작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예술가는 예술작품을 만들어야 예술가가 될 수 있고, 예술은 타자와 교류 위에 서 있다. 범죄는 범죄자의 전과기록 이외의 아무것도 만들어낼 수 없으며, 누구도 그것을 예술로 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유념하길 바란다. 
나는 예술을 이렇게 정의한다. 대상에게서 받은 영감을 오로지 그렇게 표현해야만 했던 사람이 예술인이고, 그가 만들어내는 것이 예술이다. 또한 예술 그 자체를 목적으로 갖는 것이야말로 예술가의 모럴이다.
예술의 윤리성은 대중이 걱정할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외려 예술가의 몫이다. 타자의 시선에서 완전히 소외되어, 자기만족을 위한 것은 예술이 아니라는 자각을 온 예술가는 이미 갖고 있다
"나의 제제를 더럽혔다"며 분노하는 사람들은 아이유의 '제제'에 대해 망설임 없이 틀렸다고 말한다. 그들의 논거는 단 하나다. 그것이 "윤리"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예술은 윤리적이어야 한다고 단정하는 그들에게 예술가의 모럴은 일반적 의미의 도덕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논증한 바 있다. 예술은 윤리적이어야 한다는 주장은 곧 해당 작품의 내용이 사회의 윤리적 기준에 위배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과 다름 없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기존의 작품을 불태우는 데, 예술의 역사만큼 긴 시간을 써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이유의 제제가 일반적 의미의 도덕에 위배되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녀의 제제는 그 자체로 너무나 "어린아이다웠고", 단지 그 뿐이었다.
"당신과 아이유는 틀렸다. 오직 제제를 향한 내 시선만이 옳다"고 주저 없이 선언하는 대중 속의 빅 브라더(Big Brother)들에게 이 글을 바친다. 
마지막으로, 예술을 향유하는 대중의 일원으로써, 아이유를 비롯한 모든 예술가에게 이 말을 해주고 싶다. "자신의 작품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당신을 응원합니다. 끝까지 하고 싶은 예술을 하길 바랍니다."
※ 글쓴이 = 호주에서 동양철학, 한국에서 서양철학을 공부한 23세 여자. 필명 '정눈꽃'. 아무도 읽지 않는 영화비평을 쓰면서 즐거워하는 감성 변태. 첫 장편소설 '파도는 바다와 다르지 않다' 이북(E-BOOK) 출간을 앞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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