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한국 너는 내 운명” 외교 최전선서 뛴 힐 전 미국 대사의 고백
입력 2015-10-16 11:34 
크리스토퍼 힐 자서전

1985년까지 나는 동유럽의 암울한 분위기 속에서 살았다. 그런 경험은 이제 충분하다고 생각해 동아시아로 눈을 돌렸고 한국을 선택했다. 1985년부터 1988년까지 주한 미국 대사관 경제담당관으로 일했다. 폴란드의 미래가 어두침침했다면 한국의 미래는 아주 밝았다. 한국인이 갖고 있는 열정과 활기에 반했다.”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와 6자회담 미국 측 수석대표를 역임한 크리스토퍼 힐(63)이 ‘크리스토퍼 힐 회고록 : 미국 외교의 최전선을 통해 밝힌 이야기다.
그는 2004년 주한 미국대사로 서울에 다시 왔다. 한미관계를 시대변화에 걸맞게 현대화하고 혁신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여중생 장갑차 사망 사건, 패트리어트 미사일 배치 및 미사일방어(MD) 체계 구축 등으로 반미 감정이 고조되어 있었다.
기존 대사들과 결이 다른 행보로 한국인들 속으로 파고들었다. 외교관으로서 늘 만나오던 정부 관리나 기업 임원들 뿐만 아니라 온라인 저널리스트와 학생을 만나 미국대사관을 좀 더 개방적인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대사관 다음 카페를 개설하고 한국노총 위원장을 면담하고 진보적 시민단체 주최 토론회에도 참석했다.
주한 미국대사로는 최초로 광주 5·18 묘역을 방문해 방명록에 글을 남겼다. 나는 용감했던 희생자들을 기억하기 위해 이 곳에 크나큰 존경심과 슬픔을 안고 왔습니다. 이분들이 늘 기억되고, 이들에 대한 기억이 늘 우리 모두에게 영감을 주길 기원합니다.”
8개월이라는 짧은 임기를 마친 후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로 자리를 옮겼다. 6자회담 미국 측 수석대표를 맡아 9·19공동성명이 탄생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북핵 문제를 풀기 위한 과감한 대북접근법의 전모를 회고록에 처음 공개했다. 북한을 설득하고 방코델타아시아(BDA) 문제를 풀기 위해 미국 재무부팀과 내부 논쟁을 하며 북한과 협상해나가는 과정이 담겨 있다. 북한 김계관 외무성부상과 치열하게 협상해 중국을 설득해나가는 과정, 한국과 공조 아래 6자회담 합의사항을 밀어붙이는 과정 등 세밀하게 공개해 외교사료로서 가치도 크다.
그는 부시 행정부 아래 내가 북한 차관보 같다”고 농담할 정도로 국무부, 국방부, 백악관, 네오콘과 갈등을 겪었다. 그 와중에서도 협상을 통해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한반도 비핵화 의지를 보여줬다. 당시 ‘맥아더 장군 이후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미국인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9·19 공동성명 이후 2007년 북한 핵시설 폐쇄에 관한 내용을 담은 2.13합의가 도출됐다. 그의 아이디어로 2008년 8월 영변 핵시설 냉각탑 폭파가 이뤄졌다. 그러나 그해 12월 이후 6자회담은 재개되지 못했고, 북핵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태다. 그래도 북핵 문제를 해결하고 한반도 평화를 정착시키는 중요한 이정표가 됐다.
[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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