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천재는 늘 ‘철이 덜 든 사람’...뛰어난 조력자 있어야 빛난다
입력 2015-10-15 11:08 

요즘 30대 IT CEO들에 대한 이야기가 어딜 가나 화제다. 예전 같으면 상장 기업의 과장급 나이에 거대 조직을 거느리는 최고경영자가 된 이들은 남다른 역량과 트렌디한 감각 그리고 어른들을 설득할 수 있는 외교적 역량을 갖췄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들이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선배 세대가 조언해 주고 조력자로서 끊임없이 지원해 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뛰어난 기재(奇才)와 조력자 간의 시너지는 어떻게 해서 발생하는 것일까. 거의 산업화되어 있다시피 한 현대 미술을 보면 그 실마리를 알 수 있다. 80년대 영국은 격변기에 해당했다. 신자유주의 기치를 내건 대처 정권이 들어서면서 영국의 산업과 공공부문 전체가 급격한 살빼기에 들어갔다. 대처의 구조개혁은 전체 사회의 경쟁력을 키우는 데 기여했지만, 사람들의 여유가 줄게 하는 데에도 한 몫 했다. 미술을 비롯한 문화산업도 대처식 개혁의 여파가 컸다.
그 와중에 자생적으로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 하나의 그룹이 만들어 졌다. 바로 영 브리티쉬 아티스츠(young British artists·yBA)들이다. 이들은 이전의 작품 경향과 다른 전위적 발상과 표현으로 대중의 이목을 끌면서, 갤러리나 매체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급성장한 세계 미술계의 혜성과 같은 존재들이었다. 그 중 단연 눈에 띄는 작가는 ‘상어와 ‘알약으로 유명한 데미언 허스트(Damien Hirst) 그리고 허스트 못지 않은 파격을 즐기는 트레이시 에민(Tracey Emin)이다.
일단 허스트는 삶과 죽음, 종교와 같은 문제들에 천착하면서 약품이나 화학물질과 같은 것들을 예술적 표현에 활용한 창의성으로 주목받았다. ‘살아 있는 자의 마음 속에 있는 죽음의 육체적 불가능성이라는 작품은 포름알데히드에 상어 사체를 집어 넣은 ‘수조다. 아무도 예술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법한 기괴스런 표현을 즐기는 허스트는 오히려 눈에 보이는 미추(美醜) 구별을 비웃으며 사람들의 생각을 일깨우는 작업을 했다.

허스트 못지 않게 전위적인 트레이시 에민도 주목할 만하다. 그녀는 흙 묻은 옷, 빈 술병, 침대 같은 것들로 삶의 단면을 직설적으로 표현한다. 퍼포먼스 예술과 설치 미술을 즐기는 그녀는 스스로 지녔던 사랑의 상처, 성 문제, 인간 자체에 대한 실망 같은 것들을 적나라하게 그려냈다. 그런데 허스트와 에민의 가치를 높게 평가한 경영자가 있었다. 화이트 큐브(White Cube) 갤러리의 오너인 제이 조플링(Jay Jopling)이다. 원래 영문학과 미술사를 전공한 그는 미국과 영국을 왔다 갔다 하며 전략적으로 가치가 있는 작품을 찾고 있었다. 그 와중 미국 작가들 못지 않게 파격과 창의성으로 가득 찬 그룹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자신과 똑같은 60년대 초중반 태생인 허스트, 에민과 같은 작가들에게 투자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yBA와 조플링의 만남이 갖는 가치는 단순히 수익성으로만 재단할 수 없었다. 기본적인 실력에 대한 감식안과 함께 서로 의미를 공유할 수 있는 코드가 존재했다. 많은 수집가들이 작품성에 주목하지만, 결국은 미래의 경제적 가치를 기대하고 단기적으로 접근하는 것과 달리, 조플링은 yBA 작가들이 마음껏 작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줬다. 조플링은 허스트가 좀 더 독창적이면서 본질을 꿰뚫는 창작을 하게끔 이끌어 줬다. 950억원에 육박하는 다이아몬드 해골로 알려진 ‘신의 사랑을 위하여(For the love of God)는 그렇게 탄생했다. 작품 자체를 만드는 데에만 300억원이 넘는 돈이 들어갔다. 조플링의 관심과 투자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프로젝트이기도 했다.
한편 에민이 작가로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된 이야기는 더 기막히다. 그녀는 오랫동안 인생의 방황기를 거쳐 31살에야 겨우 자신의 작품을 파는 조그마한 가게를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돈벌이가 되지 않자 영국의 각 수집가들에게 편지를 보내 20파운드씩만 후원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 와중에 몇 안 되는 응답을 보낸 사람 중 하나가 제이 조플링이었다. 그는 상처를 예술로 승화시키는 재주가 있는 에민의 스토리텔링 자체에 주목하고, 1994년 이미 최고의 경지에 올라 있었던 자신의 화이트큐브 갤러리에서 전시를 열 수 있게 도와줬다. 훌륭한 큐레이터 또는 갤러리 오너는 천재적인 작가가 높은 가격에 자신의 작품을 팔 수 있게만 도와주는 게 아니다. 계속해서 다른 사람과 연결되어 자기만의 비즈니스모델을 가질 수 있도록 기회 구조(opportunity structure) 자체를 만들어 준다. 중앙에서 이들의 실력을 검증하고 평판을 다른 이들과 공유하지만, 또 그들의 입지를 끌어올려주기도 하는 ‘게이트키퍼(Gatekeeper) 역할을 하는 것이다.
창조경제(creative economy)의 원형인 창조 산업(creative industry)이라는 개념도 yBA가 급성장할 무렵 영국과 미국의 사회과학자들이 토론한 끝에 만들어진 것이다. 단순히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창의적 발상을 해 낼 수 있는 독특한 사람들과 그들을 알아보고 지지해 줄 수 있는 조력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이론도 가능한 것이다. 기본적으로 천재들은 ‘철이 덜 든 사람들이다.사회 통념에 약하거나 냉소적이면서 시대를 앞서 가는 경향이 있는 사람이다. 그들이 세상보다 ‘반 발짝만 앞서 가게 조언해 주고, 본격적으로 도와주는 조플링 같은 인물이 있기에 진정한 창조가 가능한 것이다. 스타트업 한 개를 더 만들고, 특허 한 건을 더 출원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덕목이 아닐까 한다.
[천영준 연세대 미래융합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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