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완성차 업체들은 지난 30년 동안 꾸준히 ‘스포츠카를 지향한 쿠페(2도어 2인승의 높이가 낮은 승용차) 모델을 출시했다. 현대차는 1990년 스쿠프를 시작으로 티뷰론, 터뷸런스, 투스카니, 제네시스 쿠페로 이어지는 스포츠카 계보를 써내려갔고 기아는 엘란, GM대우(현 한국GM)은 G2X, 쌍용은 칼리스타,어울림모터스는 스피라 등을 내놨다.
사실 이들중 상당수는 엄밀히 말하면 스포츠카라고 볼 수는 없다. 1990년에 출시한 스쿠프(Scoupe)는 1985년에 출시한 일반 승용차 엑셀(Excel)의 섀시를 거의 그대로 사용했고, 1996년식 티뷰론(Tiburon)은 아반떼 1세대(1995년형) 모델에 디자인만 변경했다. 지난 2001년에 출시한 투스카니(Tuscani) 역시 엔진이 일반 승용차 엔진과 동일해 동급 아반떼XD 2.0 모델보다도 가속 능력이 떨어진다.
스포츠카의 사전적 정의는 스피드를 높이는 데 중점을 둔 오락용·경주용 자동차다. 그렇기 때문에 ‘스포츠카라는 단어가 포함하는 범위는 상당히 넓게 볼 수 있다. 단순히 속도가 빠른 차가 이에 해당할 수 있고, 컨버터블(뚜껑이 열리는 차량)과 같이 멋진 외관만을 갖추고 있는 차를 스포츠카라고 부를 수도 있다. 다만 대한민국 스포츠카의 역사를 소개하기 위해서는 그 기준을 ‘스포츠 쿠페형 자동차로 규정하는게 적절하다.
◇국산 스포츠카의 조상님, 현대 스쿠프
스쿠프(Scoupe)는 스포츠(Sport)와 쿠페(Coupe)의 합성어로 역동적인 쿠페를 지향하겠다는 현대차의 의도가 깃들어 있는 모델이다.
스쿠프가 태어난 1990년 당시 현대차는 일본 자동차 회사 미쓰비시의 기술을 받아 자동차를 제작했다. 이러한 현대차의 상황을 반영하듯 스쿠프의 디자인은 미쓰비시 이클립스 모델의 모습과 많이 닮아있다. 스쿠프는 당시 현대차 최초로 독자개발한 1.5리터 터보엔진을 얹은 차량으로 최고시속은 173km, 최고출력과 제로백(0~100km/h 도달 시간)은 각각 129마력, 9.2초였다. 현재 양산되고 있는 제네시스 쿠페의 최고출력과 제로백이 각각 350마력, 5.9초라는 점을 고려하면 비교적 보잘 것 없는 수치지만 순수하게 국산 기술만으로 쿠페형 스포츠카에 첫 걸음을 내딛었다는 데 의미가 있었다.
◇국내 최초 시속 200km돌파…티뷰론·터뷸런스
스쿠프의 뒤를 이은 모델은 현대차가 1996년부터 2001년까지 생산한 티뷰론·터뷸런스다. 티뷰론은 스페인어로 ‘상어를 뜻하는데 실제로 티뷰론의 디자인은 전면부의 그릴을 없애 보닛부터 앞 범퍼까지 매끄럽게 떨어지는 라인이 상어의 앞모습과 매우 흡사하다. 아반떼 1세대 섀시를 기본으로 제작된 티뷰론은 최고출력 150마력의 2.0 DOHC 심장을 탑재했다. 엔진은 물론 변속기(4단 자동, 5단 수동)도 국내 기술로 제작됐다. 제로백은 8.6초까지 단축시켰으며, 최고시속은 205km에 달해 국산 차량 최초로 200km/h, 이른바 ‘y의 영역(시속 200~299km)에 들어섰다. 터뷸런스는 1999년 5월 기존 티뷰론 모델에서 페이스 리프트를 거쳐 태어난 모델로 최고출력 153마력에 최고시속 220km을 기록했다.
◇최초의 6단 수동 변속기 ‘투스카니
현대차의 투스카니는 2001년 9월 출시됐다. 투스카니는 디자인에서부터 본격 스포츠카로의 변화를 예고했다. 국내 최초로 도입한 6단 수동 변속기, 국내 최대크기의 17인치 알루미늄휠, 듀얼머플러 등 스포츠카에 필요한 사양들을 아낌없이 넣어 화제가 됐다. 투스카니의 2000cc급 모델은 최대출력이 138마력으로 1990년 출시한 스쿠프에 비해 별다른 차이가 없었지만 2700cc 모델인 투스카니 엘리사는 최고 175마력을 내 국산 스포츠쿠페 사상 최대의 힘을 발휘했다. 또 투스카니는 현대차의 스포츠쿠페 가운데 최장수 모델이기도 했다. 투스카니는 2001년부터 2008년까지 생산돼 이전 모델인 스쿠프와 티뷰론의 5년을 넘어섰다.
◇정통 스포츠카를 지향하다…‘FR타입의 제네시스 쿠페
현대차는 2008년 현존하는 국산 최고성능 스포츠 쿠페, 제네시스 쿠페(이하 젠쿱)를 출시한다. 젠쿱은 스포츠 주행에 불리한 전륜구동(FF)에서 탈피해 정통 스포츠카 구조인 ‘앞 엔진 후륜구동(FR) 방식을 채택했다. 2015년형 젠쿱은 ‘최고출력 350마력, 제로백 5.9초의 고성능 스포츠카로 3.8리터 GDI(가솔린직분사)엔진을 장착했다. 초기형 젠쿱은 303마력에 제로백 6.5초였지만 2011년 말 페이스 리프트를 거치면서 가속성능도 개선했다. 이와 함께 변속기 단수도 기존 ‘자동6단·수동6단에서 ‘자동 8단·수동 6단으로 업그레이드됐다.
350마력 이상의 고출력과 5초대의 제로백, 8단 변속기를 탑재한 스포츠카를 만들어내는 브랜드는 포르쉐와 페라리, BMW, 벤츠를 제외하면 흔치 않다. 글로벌 자동차 시장에 뛰어든지 채 50년도 지나지 않은 현대차는 제네시스 쿠페를 통해 그 대열에 마침내 합류했다.
◇국산 최초의 로드스터 ‘칼리스타
현대차의 스쿠프가 국내에서 인기를 끌고 있던 즈음 쌍용차는 국내 최초의 로드스터(컨버터블의 2인승 차량) ‘칼리스타를 선보였다.
원래 영국 자동차 브랜드 ‘팬더가 1982년부터 1990년까지 생산한 모델인 칼리스타는 1987년 쌍용차가 팬더를 넘겨 받아 국내시장에 발을 들이게 됐다. 순수 국산 기술로 만들어지진 않았지만 미국 포드사에서 엔진 등 핵심 부품을 가져와 1991년부터 1994년까지 쌍용차 평택공장에서 생산됐다. 동그랗게 솟아오른 전면 헤드라이트, 극단적으로 긴 휠베이스(앞뒤 차축의 중심사이의 수평거리) 등 다소 이국적인 디자인을 뽐내며 마니아들의 이목을 끌었다. 성능 역시 뛰어났다. 칼리스타 2900cc 모델은 최고출력 145마력에 제로백은 7.9초, 최고시속은 208km를 기록했다. 하지만 이러한 고성능에도 불구하고 판매량은 저조했다. 칼리스타 2.9리터 모델의 가격은 당시 3670만원으로 2000만원대에 팔리던 그렌져 가격을 상회해 1991년부터 1994년까지 국내시장에 단 78대만 판매됐다.
◇영국 로터스의 감성을 그대로…비운의 스포츠카 ‘엘란
칼리스타에 이은 두번째 국산 컨버터블 스포츠카는 기아차의 엘란이다. 엘란은 티뷰론과 같은 해인 1996년에 출시한 로드스터 차량으로, 영국 로터스사의 기본설계를 따라 설계돼 최고출력 151마력에 최고시속 220km를 기록했다. 특히 엘란의 공차중량은 1070kg으로 경차 수준에 가까운 무게를 자랑했다. 가벼운 만큼 빨랐다. 엘란의 제로백 성능은 7.4초로 당시 국산차 중 가장 뛰어났다. 하지만 엘란 역시 3000만원에 육박하는 비싼 가격에 IMF 외환위기까지 맞닥뜨리면서 1999년 말까지 총 1000대를 밑도는 판매고를 기록했다. 하지만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인기를 끌고 있어 20년이 지난 현재에도 중고차 시장에서 거래되고 있고, 기아차 역시 시흥사업소에 엘란 전담반을 운영하고 있다.
◇1년만에 추억 속으로 사라진 G2X
G2X는 GM대우(현 한국GM)에서 2007년부터 판매한 2인승 스포츠카다. 당시 한국GM은 새턴의 스카이 모델을 OEM(주문자상표부착생산) 방식으로 수입하면서 G2X라고 이름만 바꿔 판매를 시작했다. 엠블럼만 바꿔 단 G2X의 성능은 상당한 스카이의 고스펙을 그대로 재연했다. 2.0리터 가솔린 터보엔진을 장착한 G2X는 최고출력 264마력에 제로백 5.7초, 최고시속은 227km에 달해 탁월한 주행성능을 자랑했다. 하지만 4000만원대 중반의 비싼 가격이 저조한 판매 실적으로 이어졌고 이듬해 9월에 수입이 중단됐다. 이 기간 G2X의 판매량은 100대를 조금 넘겼다.
[매경닷컴 김경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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