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세종대왕의 종묘제례악이 파리의 가을을 홀렸다
입력 2015-09-20 16:56 

세상에서 가장 느린 음악과 춤사위가 프랑스인들의 마음을 가을비처럼 촉촉히 적셨다.
지난 18일 오후 8시(현지시간) 파리 세느강을 사이에 두고 에펠탑을 마주보고 있는 국립샤이오극장엔 가야금과 거문고, 아쟁, 태평소, 해금, 편종, 편경 등 우리 전통 악기의 향연이 펼쳐졌다. 홍색의와 청색의를 입은 무용단은 극도의 절제된 손놀림을 보여주며 느림의 미학을 선보였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한편의 장대한 종합예술이었다. 대한민국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제1호인 종묘제례악이 한국과 프랑스 수교 130주년을 맞이해 상호교류의 해 개막작으로 유럽문화의 중심지인 파리 한복판에서 성공적인 데뷔를 했다. 568년만의 화려한 외출인 셈이다.
종묘제례는 조선왕조의 역대 제왕과 왕후의 신주를 모신 사당인 ‘종묘에서 매년 5월 그들을 기리는 제사를 뜻한다. 이 제사 의식에 춤과 음악, 노래를 곁들인 것이 종묘제례악이다. 조선의 건국 이념과 철학을 담고 있는 왕실문화의 결정체라 할 만하다. 80분간 종묘제례악이 펼쳐진 샤이오극장은 한국이 낳은 천재 무용가 최승희가 1938년 공연을 했던 곳이라 의미를 더했다.
종묘제례악을 만든 이는 세종대왕이다. 당시 중국에서 건너 온 문무제례악이 있었지만 세종은 1447년 고려의 향가 등을 접목해 독자적인 음악을 만들었고 이것이 세조 때부터 제례악으로 쓰였다. 세종대왕의 파리 점령이라는 해석도 가능한 이유다.

이날 극장 무대는 세 부분으로 나뉘었다. 맨 위에는 제사 의식이 펼쳐지고 무대 왼쪽과 오른쪽은 악대가 편성됐다. 중앙에는 무용수들이 절도 있는 춤사위를 보여줬다. 제사의식의 순서가 음악과 춤의 템포와 분위기를 결정했다.
조상의 혼백을 맞이하는 영신, 폐백을 올리는 전폐, 제사 음식을 올리는 진찬, 세 차례 술을 올리고 음복하고, 조상의 혼백을 보내는 송신 의식이 차례로 펼쳐졌다. 마지막으로 축문과 폐백을 묻고 태워 제의를 마쳤다.
악대에서는 보태평 11곡과 정대업 11곡이 연주됐으며 무용단은 왕의 문치와 무공을 기리는 춤인 일무(佾舞)를 췄다. 선대 왕의 문치를 찬양할 때는 우아한 분위기가 펼쳐졌고, 무공을 기릴 때는 템포도 빨라지고 움직임도 경쾌해졌다.
김해숙 국립국악원 원장은 음악과 노래를 담당하는 정악단 50명은 자다 깨도 연주할 수 있는 베테랑들이며 이번에 35명으로 확대 편성된 무용단 역시 칼의 각도까지 일치시키기 위해 말 그대로 호흡을 맞췄다. 6개월간 맹훈련했다”고 강조했다. 무대에 오르지 않은 제작 인원까지 합치면 총 120명으로 종묘제례악 해외 공연으로는 역대 최대 규모다. 디디에 데샹 샤이오극장장은 티켓을 오픈하자마자 1250석 전석이 순식간에 매진돼 깜짝 놀랐다”며 한국 문화의 뿌리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이어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사는 현대인에게 종묘제례악은 생각할 수 있는 시간과 힐링을 선사했다”고 평가했다.
한국계 입양아 출신인 플뢰르 펠르랭 프랑스 문화부 장관은 이날 공연을 관람하기 앞서 600년 가까이 이어온 종묘제례악을 이곳에서 만난 것은 감동”이라고 했다. 황교안 국무총리, 로랑 파비위스 프랑스 외무장관도 개막 공연을 관람했다. 무대가 막을 내리자 꼬마 관객들도 브라보”를 외쳤다. 파리 시민인 한 중년 여성은 드라마 대장금을 봐서 한국 전통 의상이 익숙했다. 느린 분위기와 느린 음악이 너무 인상 깊었다”고 말했다. 여대생 나탈리는 프랑스 사람들이 K팝을 좋아하고, 가수 싸이도 파리에서 공연을 했다. 종묘제례악을 통해 한국 역사를 배울 수 있어 너무 소중한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독일 출신의 무용 전문가 토마스 한은 노래와 움직임, 의식이 한꺼번에 이뤄지는 것이 너무 인상적이고 강렬했다”고 평했다. 18~19일 이틀간 파리 무대에 선 종묘제례악은 베를린과 마드리드, 런던, 부다페스트를 순회하며 외연을 넓힐 예정이다.
[파리 = 이향휘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MBN APP 다운로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