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한 배에 몸을 싣고 조선에 첫발을 내디딘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1859~1916)와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1858~1902)가 개신교 복음을 전한 지 130년이 되는 해다. 1885년 4월 5일 20대의 젊은 나이에 한국에 온 두 선교사는 선교뿐 아니라 교육·의료 사업에도 헌신했다. 둘은 교파를 초월해 복음을 전파했고 한국 사회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미국 동부지역 곳곳에 스며있는 두 선교사의 발자취를 추적하면서 오늘날 한국 개신교 혁신에 주는 시사점을 짚어봤다.
지난 8일 오전(현지시간) 미국 럿거스 주립대학의 뉴브런즈윅신학대학원. 이곳에서 30년 넘게 재직한 존 코클리 교수가 한국 기자들을 반갑게 맞았다. 새문안교회와 연세대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 그리고 YMCA를 세우고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한 선교사가 바로 이 대학 출신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다.
존 코클리 교수는 기자들에게 1909년 언더우드의 육성 증언 한 토막을 소개했다. 저(언더우드)는 인도 선교를 준비해왔습니다. …하지만 한국에 선교사를 보내려는 교회는 한 군데도 없었습니다. ‘왜 너 자신이 가지 않느냐? 이런 메시지가 제 가슴을 울려온 것은 바로 이 때였습니다.” 결심은 1200만명의 사람들이 복음 없이 살고 있다는 ‘은둔의 나라(the Hermit Kingdom) 조선에 관한 앨트먼 목사의 보고서를 접한 직후 이뤄졌다.
당시 미국 선교사들에게 조선은 세상의 끝이었다. 선교 불모지인 것이 당연했다. 가문의 타자기 사업이 성공해 미국에서 부유하게 살 수 있었지만 언더우드는 억척스럽게 한국행을 고집했다. 스물여섯 나이인 1885년 4월 5일 인천 제물포항을 통해 한국에 온 그는 열악한 환경과 싸웠다. 여름이면 모기와 파리떼, 천연두 이질 설사병 장티푸스 발진티푸스가 들끓었다.
언더우드는 훗날 한국에 가려면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고 들었지만 그곳은 우리가 뚫고 들어가야 할 마지막 나라였다”고 밝혔다. 아내 릴리어스 호턴도 이같이 회고했다. 어떻게 그가 그곳에서 죽지 않고 견뎠는가는 인간의 지혜로는 풀 수 없는 의문이다.” 조선인들은 파란 눈의 언더우드를 적대시했음에도 그는 교육·의료·선교 모두 헌신적이었다.
언더우드가 살았던 마을과 학교를 직접 가보니 그의 열정적인 면모를 다소 가늠해볼 수 있었다. 그는 뉴저지 노스버겐시티에서 뉴욕 맨해튼에 있는 뉴욕대학까지 11km를 매일 걸어서 통학했다고 한다. 이곳에 동행한 윤사무엘 목사는 언더우드는 아침 5시에 일어나 밤 12시까지 공부했고, 점심은 겨우 요기나 할 정도로 에너지 넘치는 삶을 살았다”고 귀띔했다.
인습이나 구속에 얽매이지 않는 뉴브런즈윅의 학풍도 언더우드의 한국 선교에 큰 영향을 끼친 것 같다. 뉴브런즈윅은 유럽으로부터 자주적인 신학을 연구하기 위해 미국 최초로 설립된 개신교 신학대학이다. 창립자인 리빙스턴 교수는 앞장서 노예를 해방시킨 자유주의자다. 19세기 졸업생 전체의 15% 가량이 해외선교에 나섰다.
이 대학의 그렉 A. 매스트 총장은 우리 대학 출신 졸업생들이 세계 각지에 선교를 펼쳤다”며 언더우드도 존경하는 동문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뉴브런즈윅은 언더우드의 흉상을 연세대로부터 기증받아 10년 전부터 도서관에 전시해놓고 있는 한편 그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언더우드 글로벌크리스챤센터를 설립해 연구·학술활동을 펼치고 있다.
언더우드는 1916년 향년 57세 나이로 미국 뉴저지 아틀랜틱시티에서 생을 마감하기 직전 아내에게 이같이 말했다. 내가, 내가, 거기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아…” 어디요, 여보, 코리아?” 그제서야 그의 얼굴이 환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고 한다. 지난 7일 찾은 그의 고향마을 뉴저지 노스버겐시티의 ‘그로브 개혁교회는 고즈넉했다. 이곳 공동묘지엔 언더우드의 유해가 묻혀 있었으나 한국을 향한 그의 뜻을 받들어 1999년 서울 양화진에 이장됐다.
김진홍 뉴브런즈윅신학대학원 교수는 언더우드의 장기적 비전은 교파를 뛰어넘는 선교 토착화를 바탕으로 한 ‘크리스천 코리아(기독교가 한국 사회를 이끌어야 한다는 믿음)이었다”며 그의 정신은 교차로에 선 오늘날 한국 개신교 현실에 해답을 준다”고 분석했다.
[미국 동부지역(뉴욕·뉴저지·필라델피아) = 이기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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